재현과 흔적 사이에서 길 찾기 : 오석근의 기억작업
전진성 (부산교대 교수, 역사학자)
매번 새로운 도시에 도착할 때마다 여행자는 그가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 이탈로 칼비노, 『보이지 않는 도시들』 (1972)
수도권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항구도시 인천은 작가 오석근에게 삶과 작업의 터전이다. 원숙한 기량으로 가히 전방위적인 활동을 펼치는 예술가에게 고향 인천의 혼잡한 살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폐선과 폐가, 그리고 각종 산업 폐기물이 이미 풍경의 일부가 된 그늘진 도시의 모퉁이에서 작가는 나뭇결처럼 미세한 시간의 층적을 탐사한다. 그것은 도시의 실루엣을 그저 디자인의 소재로 보는 외부적 시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활인의 내부적 시각도 아니다. 초현실주의도, 사실주의도, 물론 극사실주의는 더더욱 아니다. 오석근의 카메라에 포착된 인천은 무미건조하고 범속한 일상을 보여주지만 한 컷 한 컷 이어지며 깊게 패인 흔적을 마주칠 때마다 쓰라림을 전해준다. 인천은 늘 새로운 영감의 원천인 동시에 떨칠 수 없는 과거의 망령이 출몰하는 장지(葬地)이다.
길거리에서 썩고 있는 자동차 타이어, 폐수 위를 둥둥 떠다니는 기름과 기계 부스러기들, 부둣가에 방치된 그물과 석재, 그리고 임의적으로 증축된 집들은 고유의 생명력이 제거된 채 무한대로 ‘리사이클링’되는 산업사회의 알레고리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삶과 죽음, 현재와 과거가 내밀하게 교차하는 운명의 알레고리, 달리 말해 작가 개인의 역사적 초상이기도하다. 인천은 한 예술가를 붙들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운명을 직시하라고 요구한다. 오석근의 예술 활동은 바로 이 요구에 응답하고자 지배적인 예술적, 정치적, 역사적 재현의 체계와 외면하고 싶은 흔적 사이에서 기억의 올을 꿰어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겠다.
오석근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진 <교과서(철수와 영희)〉는 기성의 재현 질서를 밀어제치고 불미스런 과거로 우리를 초대한다. 한국의 기성세대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모티프의 생뚱맞은 재연은 익숙함이 아니라 오히려 생경함을 창출한다. 장롱 속에, 담벼락 앞에, 지붕 위에, 건물 옥상에, 다리 밑에, 야산에, 아파트 구석의 음지에, 심지어 시위 현장이나 바다 수면에, 기중기에 거꾸로 매달린 채로 느닷없이 출현하는 철수와 영희는 오염된 환경에서 뛰어놀고, 동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고, 도색잡지를 훔쳐보며, 으슥한 곳에서 서로 금지된 장난을 즐긴다. 함께 서서 소변도 본다. 의상과 소품, 포즈도 제멋대로이다. 교과서의 정형을 벗어나 탈선을 일삼는 철수와 영희의 모습, 익살스러우면서도 우울하며 - 시쳇말로 ‘웃픈’ -,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그들의 모습은 우리 각자의 과거를 환기시킨다. 애써 외면하려 했지만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해온 날선 과거가 생채기를 들쑤신다. 우리의 민낯을 감추는 도구였던 철수와 영희의 가면이 어느덧 우리의 감출 수 없는 민낯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원리적으로 볼 때, 창조적 모방이란 현실을 타개하고자하는 열망에서 비롯된다. 우리의 비루한 현실은 문학에서 말하는 이른바 ‘미메시스(mimesis)’를 통해 그럴듯한 이야기로 재현됨으로써 비로소 우리와 격리된다. 추악하고 비참한 현실도 이야기로 엮이고 나면 그런대로 받아들일만하고. 심지어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런데 사진은 문학이 아니다. 문학보다 훨씬 촉각적임에도 여전히 이야기를 전해주는 영화와도 다르다. 사진도 실재를 모방/재현하기는 하지만 좀처럼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는다. 사진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빙그레 웃기만 한다. 사진 속에서 시간은 정지되어있다. 정지된 시간은 이야기를 중단시켜버리는 대가로 이야기가 외면해온 피사체의 자국을 슬며시 드러낸다. <교과서(철수와 영희)〉도 비록 연극적이기는 하지만 무언가의 흔적을 포착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적 가면 아래 꼭꼭 감추어두었던 우리자신의 상처 난 얼굴이다.
현실이란 늘 현실 이상이다. 오석근이 2009년부터 2012년까지 진행한 프로젝트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는 그 제목을 최남선의 시에서 따온 것이건만 개인 사진첩을 빌려온 듯 소박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기에 낯설게 느껴지는 사진들이다. 우리자신의 별 볼일 없고 회한이 서린 과거가 우리를 버젓이 응시한다. 나무 사이로 카메라의 초점이 흐릿하게 맺혀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한 청소년 피사체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오석근의 작품을 대하는 우리는 진한 상실감을 느낀다. 그런데 우리가 상실한 것은 과거 그 자체가 아니다. 과거와 이별하는 것은 그 자체로는 상실이 아니다. 상실은 이미 과거에 이루어졌다. 이미 과거에 우리는 억압당하고 상처 입었으며 아쉬워했다. 오석근의 작품은 매번 새로이 그가 결코 가질 수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재발견한다.
과거는 상실되기는커녕 여전히 현재를 옥죄고 있다.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다양한 증상으로 ‘반복강박’되는 과거를 끊어내어야 정상적인 의식을 유지할 수 있다. 뼈아픈 과거와 결별하려는 노력이 바로 애도작업(Trauerarbeit)인데, 이를 통해 과거는 더 이상 현재를 방해하지 않고 비로소 나의 정체성의 일부로 온전히 편입될 수 있다. 이처럼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전향적인 관계를 모색하는 애도작업이야말로 모든 기억작업(Erinnerungsarbeit)의 원형이다. 그런데 이와는 대조적으로 반복강박되는 과거의 실체를 계속 캐묻는 오석근의 기억작업은 스스로 기꺼이 증상이 되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과거의 지울 수 없는 고통과 이루어지지 못했던 꿈들을 현재의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한다. 이것들은 애도의 대상이기는커녕 여전히 씨름해야할 현재적 사안이다. 프로이트는 트라우마의 증상적 발현을 ‘행동화(Agieren, acting-out)’라 명명한 바 있는데, 오석근의 작품들은 무의식적인 행동화와 예술적 재현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물론 그것은 증상만이 아니라 증상에 대한 처방이며, 억압된 기억인 동시에 그 억압에 대한 기억이다.
오석근의 기억작업은 자신에 대해 직접 말하지는 않지만, 증상의 형태로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고백하고 되묻는다. 그러면서 그의 작업은 자신을 둘러싼 더 넓은 세계로 향한다. 예술적 재현이 어느덧 역사적 재현과 만나게 된다. 오석근은 시각 이미지의 잠재력을 의식하고 십분 활용하는 작가이다. 시각 이미지는 오랜 인류의 경험이 농축된 기억의 저장소이자 매체이다. 시각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서술(historiography) – 역사이론가 헤이든 화이트(Hayden White)의 표현을 빌면 역사촬영(historiophoty) - 의 자격을 지닌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해석 방식을 관철시키고 역사적 주체가 사회적, 정치적 현실과 맺는 관계를 심미적으로 재구성한다. 오석근이 펼쳐내는 이른바 ‘시각사(visual history)’는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이다.
마치 성과 속의 구분을 허물려는 듯, 서양 중세교회의 제단화에 주로 사용되던 세 폭 제단화(triptych) 양식을 차용하여, 가운데는 주름과 생채기가 가득한 성매매 여성의 신체를, 양 옆에는 영세하고 퇴락한 옛 건물의 볼품없는 모습이 서로 공명을 이루도록 배치한 작품 〈축(Chug)〉, 일제강점기 유곽으로부터 시작되어 현재는 퇴락 일로에 들어선 대구의 성매매 집결지 ‘자갈마당’을 상세하게 탐사한 공동 사진집 〈자갈마당〉, 3 · 15 부정선거와 4 · 19혁명 직전과 직후, 5 · 16 군사쿠데타 직전과 직후, 광주 5 · 18 직전과 직후를 배경으로 국가가 기록한 한국현대사의 상징적인 장면들을 되짚어보는 〈기억투쟁〉, 대한민국 국군의 호전적인 몸동작을 패러디한 퍼포먼스 영상 〈명령레지스터〉 및 〈명령펄스〉, 보도연맹 사건을 배경으로 형장의 사형수들과 집행자들, 주검을 수습하며 울부짖는 어머니 등 고난의 이미지를 지하감옥처럼 연출한 공간해방에서의 개인전 <기억투쟁>, 그리고 월미도 미군민간인폭격사건, 강화도 양민학살 등 인천 지역에서 자행된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구술을 채록하고 사진자료를 탐색한 공동기획 〈국가의 환영(Halluci_Nation)〉 등은 모두 시각 이미지를 사실 전달의 매체로만이 아니라 역사 · 정치적인 발언이자 해석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작품들은 시간적, 공간적, 정치적 거리를 한순간에 무화시키고 타자의 아픔이 나 자신의 아픔과 그리 멀지 않음을 직감하게 만든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주검을 애처롭게 바라본다.
시각 이미지로 서술된 역사는 문자를 통한 재현과는 달리 사실들 간의 인과관계보다는 경험의 심연을 드러내준다. 시간이 흘러 잊힌 경험이 아니라 아예 경험의 첫 순간부터 제대로 경험될 수 없어 애초에 기억되기를 마다했던 극심한 고통과 공포, 절망, 혹은 죄책감이나 수치심, 욕정과 외면의 틈새에 역사적 진실이 놓여있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온전한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원천적으로 배제된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하나이다.
오석근의 기억작업은 늘 무겁지만은 않다. 〈한국의 풍습〉은 그의 작품집 중에서 가장 익살스럽다. 일종의 패러디로서 도큐멘테이션도 포함하고 있는 이 작품집은 소위 민족사와 민족문화라는 허상을 유쾌하게 조롱한다. 그렇지만 여기서도 작가 고유의 문제의식은 유지되고 있다. 지배적인 재현의 질서가 와해되면서 역사의 공백이 가시화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 공백의 자리에 공간과 사물을 배치한다. 그것은 재현을 벗어나기 위한 재현의 전략이다. 작가가 인천과 서울을 오가며 눈앞에 펼쳐진 공간과 사물들을 기록한 〈경인 무브방〉은 작가의 여느 작품들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범속한 일상 속에서의 온전한 경험과 기억의 가능성을 탐색했다.
오석근의 기억작업은 늘 공간을 염두에 둔다. 공간이 중요한 것은 그곳에 기억이 담겨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기억의 부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나의 과거는 남아있지 않다. 흔적은 상실 그 자체에 내재해있기에 마치 세밀한 동판처럼 오로지 재현을 통해서만 윤곽을 드러낸다. 2012년 서울시 종로구 연지동의 버려진 한옥에서 진행한 개인전 〈두 개의 집〉은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마련된 청(소)년 사진들을 여기저기 설치해놓았는데, 주로 교복이나 체육복을 입은 사진 속의 청(소)년들은 악동에 가까운 철수와 영희에 비해 제법 의젓해 보이지만 어딘가 화석 같아 보이며, 더구나 텅 빈 집 안에 멈추어서있기에 적막함을 배가시킨다. 한옥 두 채가 벽을 허물고 합쳐진 이 집은 그 구조 자체가 기억이 머물기에는 너무 어정쩡하다. 아버지와 함께 찍은 사진은 모서리가 타버린 상태이고 교복 입은 학생의 빛바랜 초상사진은 마치 영정사진처럼 보인다. 마당에는 유리판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는데, 그 위에 정자로 써놓은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라는 문구는 최남선 시에서 빌려온 것으로, 그 표면적 결기에도 불구하고 공허한 독백내지는 반어법처럼 들린다. 이것이야말로 트라우마의 증상적 발현, 달리 말해 과거를 암시하는 흔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방 한구석의 깨진 거울 위에 쓰인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 거면서”라는 푸념어린 낙서는 작가의 의도를 좀 더 분명히 드러낸다.
개인전 〈두 개의 집〉은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프로젝트와 더불어 작가가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재와 먼지〉 프로젝트를 결합시켰다. 후자는 인천 중구에 산재하는 국적불명의 건축물들을 촬영하여 기억의 부재를 좀 더 실체화했다. 건물들은 제멋대로 증축되고 합체되고 쪼개어져있다. 기억이 머물지 못하고 임시적인 삶만을 허용하는 이 건축물들은 실로 죽음의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다. 제목이 암시하는 대로 재와 먼지야말로 이 공간의 본질이다. 〈두 개의 집〉의 주방에는 타일바닥에 사진을 태운 재가 수북이 쌓여있고 그 위에 생뚱맞게 유리 항아리가 놓여있는데, 그 옆에는 굵은 프레임의 여배우 초상사진이 보인다. 예술가가 추구하는 심미적 재현이란 이처럼 다시는 주어 담을 수 없는 인생의 잿가루를 방기한 채 생뚱맞게 반짝거리는 저 유리 항아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오석근의 사진은 결국 죽음의 흔적을 재현함으로써 재현을 넘어선다. 말끔한 재현에 의해 도착(倒錯)된 현실이 사진 속의 흔적이 유발하는 환기력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감출 수 없는 흔적이 재현의 거짓을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새로운 역사적 전망이 열린다. 오석근의 사진이 포착하는 시간은 철학자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여성적 시간(le temps des femmes)”의 특징으로 거론한 이른바 미래완료(future perfect)의 시간에 가깝다. 임신과 출산으로 대변되는 반복성과 영원성의 시간은 아직도 완료되지 않은 오래 전의 미래이다.
오석근은 아직도 인천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는 이제 그곳에서 미래를 기억하고자한다. “마계 인천”에서 발원한 회전예술, 예술가와 생활인의 경계가 사라지고 일상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되는 코스모스 다방(Coda), 비인간화된 도시의 젊은 예술인들이 영상언어의 근원적인 힘을 바탕으로 자생적으로 만들어가는 인천국제비엔나소시지영화제, 한국사회의 위선적인 가치에 도전하는 불온한 전시 및 레이브 파티를 제공하는 순정랜드, 국철 1호선 인천역사 및 광장에서 지역 청년예술가들과 함께 지역성, 장소성 그리고 예술의 공공성에 대해 묻고 젊은 예술가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새인천 대축전 등은 인천을 진정으로 미래완료적인 기억의 터로 만들어가려는 꽤 야심적인, 어쩌면 처절하기 그지없는 시도이다.
고향 인천에서 오석근은 차마 기억할 수 없었던, 실은 제대로 완료되지 못했던 자신의 경험과 꿈을 매번 다시 발견한다. 이탈리아 작가 이탈로 칼비노가 『보이지 않는 도시들』 (1972)에서 말했듯, “실현되지 않는 미래들은 과거의 가지들일 뿐이다. 마른가지들.” 과거의 마른가지들이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길을 가로막고 있다면, 우리가 할 일은 마른가지들을 모조리 쳐내고 희망찬 대로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나마 우리에게 주어진 소로를 되돌아보고 가꾸는 일일 것이다. Amor fati!
근대도시 인천의 부상하는 빛들, 여며진 역사와 형이상학
김남수 (미술비평)
#1. “페테르부르크는 — 무한등급으로 승격된 무한한 대로들의 총체. 페테르부르크 너머에는 —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벨르이, <페테르부르크> 중에서)
#2. “여기서 강한 빛(luce)과 약한 빛(lucciole)의 관계가 완전히 뒤바뀌는 사태를 상상해보자. 그러면 한편에는 눈부신 빛으로 파시즘 독재자의 후광을 만드는 선전용 서치라이트가 존재할 것이다.”(디디-위베르만, <반딧불의 잔존> 중에서)
오석근 작가가 찍은 사진 속에는 바야흐로 밤이 오고 있다. 이 밤은 역사의 밤이다. 그 밤이라는 시대가 근착하기 위해서는 황혼이라는 시간의 영역을 지나가야 한다. 어쩌면 인천[仁川]이라는 도시의 그 ‘인’[仁]은 “어질다”라는 사전적인 뜻도 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새로운 애니미즘적 생명기운”이라는 학술적인 뜻도 있는 것에 비춰 보면, 이 황혼은 밤으로 가는 여로이기는 하나 그 밤이 갖는 몰락의 분위기와 동시에 새로운 생명의 예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밤이 온다는 것은 어둠이 깔린다는 것이고, 색채로 치면 점차 블랙이 될 것이다. 확실히 서구 근대 비판으로서의 포스트모던 이후의 시계장치는 주어진 시간 자원을 다 소모한 것처럼 문명의 발 아래 가까운 길들도 어둠에 잠겨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또한 이정표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컨템포러리라느니, 그로부터 컨템포러리를 다시 하나의 유행사조로 취급하여 울트라컨템포러리라느니 하는 시간적 장난이 서구미술계에서는 진행되고 있지만, 이는 거시적으로 기만적 전술에 지나지 않는다. <신국론> <신학대전> 등에서 설계된 서구의 가장 밑변으로 흐르는 시간의 형이상학은 이제 그 바닥을 드러내고, 그 토대 위에서 상부구조를 지어온 문명은 더 이상 시계의 침들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황혼은 철학의 종언(1928)부터 시작한 수많은 종언 시리즈가 결국 예술의 종언(1984)과 역사의 종언(1989)으로 마무리되었지만, 주변부에 사는 우리들에게 이는 직설적으로 ‘The End’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니, 이것은 서구 한복판에서도 우당탕탕 하는 갑론을박의 진흙탕처럼 어느 누구 하나 이 ‘끝’이라는 의미를 액면가 그대로 수용하지 못했다. 예외가 있다면, 철학자 데리다가 이 ‘끝’을 거부하는 몸짓으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우리는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는 법?”이라는 반문과 함께 이 ‘끝’의 벼랑으로 떨어진 존재들이 유령적인 것으로서 귀환한다는, 제법 정직한 이야기를 펼쳐놓은 것이 있다. 여기서 “사는 법”이란 죽음의 상태에서 돌아온다는 종언의식이 깔려 있다.
이러한 ‘끝’ 이후의 혼란상은 작금의 디지털 테크놀로지와 AI 같은 기술 기반 위에서 포스트인터넷아트를 진행한다거나 호모 데우스 형식의 네오데카르트적 선상으로 퇴행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밤이 오고 어둠이 깔리는 동안, 서구에서 새로운 빛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에 기대면, 잔해들만 낭자하다. 잔해 위에 다시 잔해가 쉼없이 쌓이는 가운데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잔해들을 모아서 다시 결합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묵시론적 폭풍이 몰아닥쳐 잔해의 더미는 하늘까지 치솟는다는 것이다. 물색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마치 기념탑이라도 되는 양.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실제적 현실일지 모른다. 여전히 탑을 우러르는 기분으로. 이 지점에서 필자는 근대도시 인천을 사진 찍는 오석근 작가의 세계에서 그 반전의 계기를 보고자 하는데, 이는 이러한 실상을 전제한 후의 일이 될 것이다. 일단 인천의 ‘천’[川]은 “냇물”이라는 의미인데, 확실히 이 도시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듯한 황혼 무렵의 사진이 있다. 작가는 이 사진 속에 지금의 ‘끝’에 다다른 시간과는 유다른 시간, 새로운 시간관의 문을 여는 시간의 입구를 마련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 사진에서 냇물의 물줄기처럼 보이는 것은 거대한 뱀처럼 지재그로 대범한 동선을 그리고 있다. 한없이 블랙에 가까운 블루톤의 이 동선은 저기 멀리 지평에 우뚝 서 있는 아파트촌의 서치라이트 불빛, 그 지배적인 강한 빛과는 극히 대조적으로 희미하면서 은은하다. 그래도 어둡고 암암하며 약한 빛이 은근히 비친다. 이 꿈틀거리고 구불거리는 뱀의 물길-이미지는 내재하는 빛들, 미소한 빛들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저기 멀리 있는 지평은 강한 빛으로 우리를 유혹하면서 여전히 문명적 삶의 구원을 약속하는 듯 보인다.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진은 인천의 냇물이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여울이 보이지 않는 풍경이 아니다. 작가는 북성포구라는 곳, 바다와의 연접은 끊어졌지만 여전히 갯벌을 유지하고 있는 북성포구라는 장소에서 이 기묘한 풍경을 찍었다. 바다를 잃어 세트장처럼 공중에 떠 있지만, 상인들이 다른 곳에서 해산물을 공수해와서 갯벌을 연출하고 상거래를 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어쩌면 인천이라는 태초의 국제무역항이자 근대의 개항지가 이러한 현주소를 갖는다고 상징화하고 있는지 모른다.
오석근 작가는 국가기관이 점유하고 있는 상상플랫폼을 포함한 인천 내항을 “시민들의 품으로 돌려달라”는 청원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인천이라고 하면,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부터 떠오르지만 기묘하게도 인천은 바다를 박탈당해왔다는 것이다. 해수욕을 할 수도 아름다운 해안 풍경을 감상할 수도 없는 기형적이고 굴절된 시간 속에서 바다 역시 세트장처럼 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오석근 작가가 국가 폭력이 행사해온 억압의 역사를 기록으로 증언하는 <그날의 훌라송>, <기억투쟁> 등의 전시를 펼쳐온 것도 일관성 있는 작가의 실천적 활동이다. 그리고 빛은 시간의 아카이브가 가능하다. 은판 사진은 저 태양이라는 광원이 시간적 추이에 따른 빛의 구체적 특질을 켜켜이 받아들인 근대의 테크놀로지 산물이다. <탕플대로의 광경(Boulevard du Temple : 1838년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가 약 10분의 노출로 촬영한 사진)>에 비어 있는 풍경은 사람이 비워진 지옥도처럼 여겨지는데, 다른 시간대의 빛들이 쌓이는 겹겹이 갈피 넣어진 것이다. 그런데 장시간 노출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그 겹과 겹 사이에서 사라지는 포스트휴먼의 감각이 시초부터였다. 그러한 사람들을 약한 빛의 아카이브로 나타남의 사건으로 다루는 것이 위의 전시들의 특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북성포구의 저 “바다로 흘러드는 냇물” 같은 환시가 왜 가짜이면서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인천의 상징적 표상이 되는가를 물어야 한다. 좌우간 빛은 거기 있다. 빛은 인천의 하늘 궁창에 그대로 있으며, 이는 자연, 즉 스스로 그러한 빛의 아카이브 상태로 온존해 있다. 여기에 오석근 작가의 사진 작업은 빛(들)의 선택과 배치에 의해 색이 각각의 빛이 갖는 시간적 주파수로 작동한다. 이러한 논리에서 백남준 작가는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비디오로 작업하기 전까지는 색이 시간의 주파수라는 사실을 몰랐다.”
빛 상태에서 색은 어느 시간대와 접속하는 게이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대단히 파격적인 발상인데, 사실 이러한 발상은 괴테-백남준-하이젠베르크가 공유하는 어떤 코드이기도 하다. 즉 어떠한 색의 빛을 선택하는가에 따라 특정한 시간대의 주파수를 맞출 수 있으며 심지어 나타나게도 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이 북성포구의 풍경은 인천이라는 도시가 빛의 아카이브 속에서 상징화되는 사진임에 틀림없다. 아파트촌의 파시즘 독재자 같고 감시탑 같은 스포트라이트가 뒤쫒는 강한 빛이 지배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물길은 그러나 납작하게 엎드려서 도도하게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 제 갈 길을 유유히 간다. 거기에 빛이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약한 빛이. 오석근 작가는 이렇게 질문한다.
#3. “아! 까마귀를 검은 빛에 가두었으면 충분한데도, 다시금 까마귀를 천하의 온갖 빛깔에다가 가두었구나. 까마귀가 과연 검기는 검다. 그러나 누가 다시 이른바 푸르고 붉은 것이 그 빛깔[色] 가운데 깃든 빛[光]인 줄을 알겠는가? 검은 것[黑]을 일러 어둡다[闇]고 하는 자는 단지 까마귀를 알지 못하는 것일 뿐 아니라 검은 것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 이런 까닭에 빛깔 있는 것 치고 빛이 있지 않는 것이 없고, 형상[形] 있는 것에 태[態]가 없는 것은 없다.” (박지원, <열하일기> 중에서)
서구에서 검은 색은 어둡다. 빛이 없는 것이 흑체이다. 러시아의 말레비치와 미국의 마크 로스코 정도만이 검은 빛의 아이러니 속에서 종교적인 법열에 가까운 미학에 다가갈 수 있었다. 그 빛이 동아시아에서는 푸른 빛을 머금은 검은 빛으로서의 ‘현’[玄]에 해당한다. 보통 검을 현[玄]이란 것은 “검푸르다” “검고 신비로우며 깊다” 라고 새기지만, 사실은 그 글자 모양처럼 생명의 뱀이 꿈틀거리는 심연의 쪽빛에 가깝다. 오석근 작가의 사진 속에서 냇물을 은은한 쪽빛을 배경으로 서치라이트에 결코 묻히지 않는 푸른 빛을 드러낸다. 청출어람[靑出於藍], 즉 쪽빛이라는 깊은 어둠이 내어놓는 약한 빛 속에서 다시 생명성의 징후가 감도는 푸른 빛이 돌연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지평에 꽉 차오르는 문명의 거대하고 강한 빛들이 백열에 가까운 톤으로 물들이고 있지만, 저 하늘의 궁창이 고유한 푸른 빛으로 하강하고 있고 저 아래의 냇물 물줄기가 자신의 궁창인 바다를 향하며 역시 푸른 빛으로 기어가고 있다. 이 빛들의 길항과 압력. 그런데도 지평은 이미 시간이 다 된 문명의 자기 현위치를 알지 못하며, 여여하게 섬광처럼 눈을 찌른다.
그러나 “물은 검기[玄] 때문에 능히 비출 수가 있고, 칠[漆]은 검은[黑] 까닭에 능히 거울이 될 수가 있다”는 명제는 그 ‘살아감’이라는 구체적인 현실로서 체험되는 차원에 관여하기 때문에 작금의 ‘끝’ 이후의 문명 생활, 즉 ‘삶’이라는 보편적 현실 — 추상적인 차원에서의 ‘삶’ -- 과는 결이 갈라진다. 이제 저 꿈틀거리는 물줄기가 검기 때문에 빛을 비추고, 능히 물거울로서 반영하는 것을 따라갈 필요가 있겠다.
오석근 작가는 인천[仁川]이라는 도시 위를 한 마리 까마귀처럼 비상하여 날고 있는지 모른다. 오감도[烏瞰圖]로서의 사진. 머리 뒤쪽 7도 정도의 사각을 제외하면 전후좌우를 한번에 조감하는 시각성. 그리고 정신의 양식으로서 모나드의 구축. 이러한 프레이즈의 나열이 그의 사진 속에는 충분히 드러난다.
‘철거’라고 담벼락에 적힌 낡은 집은 기묘한 집(들)의 동거 체제를 보여준다. 1930년대 일본인에 의해 지어진 일식주택(사진의 중앙과 오른쪽)과 일본의 문화주택에 영향받은 한국의 근대가옥(왼쪽)이 서로 마주한 것이 ㄷ(디귿) 자 모양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그 ‘ㄷ’의 우묵한 부분은 플라스틱 지붕으로 임시방편 삼아 설치해두었다. 이미 허물어져 가는 담벼락은 이 건물 안으로 출입금지 시키는 노끈이 동여매져 있는데, 해학적으로 두 개의 다른 양식의 건축을 묶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이 건물 너머에는 아주 칠흑같이 검은 집이 독일표현주의식의 비스듬한 지붕선을 유지한 채 암암하게 우뚝 서 있다. 묘하게도 이 검은 집의 형체에서는 어떠한 빛도 거울도 새어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에 마치 그 집으로부터 생명 기운이 뻗는다는 듯이 삐죽삐죽한 나뭇가지들이 사방 돌출해 있다. 물론 이는 집과 별개로 나무의 존재가 있음을 물리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지만, 이 사진의 칠흑 어둠은 집 자체가 은유적이며 실재적으로 그 가지들을 뻗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는 전선줄이 역시 더 급한 경사로 지나간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진인가. 이 한 장의 사진 속에 인천의 역사적 명운이 어떻게 조락하고 있는가, 이제 곧 역사의 폭풍 속에서 잔해더미로 화해갈 것인가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마계도시처럼 무엇인가 암암하면서도 울울한 저 검은 집의 정체 역시 양가적으로 마치 연출된 것인 양 저렇게 괴랄하게 서 있는 것이다. 이 기묘한 구도와 압축, 그리고 도시의 본질을 현상하는 섬망과 환영이 단연 압권이다. 여기에는 전통과 근대도시라는 ‘잔존하는 것’에 무게를 싣지도, 그렇다고 철거 및 재건축이라는 ‘지배적인 것’으로 기울기도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부상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순과 역설, 이종접합과 복합성으로 점철된 이 도시의 상공을 날고 있는 까마귀로서의 작가 자신이 아닌가. 까마귀의 비상과 오감도의 시각. 여기에 근대도시의 유산이 점차 소멸해가는 흐름과 여전히 발전 담론에 지배되는 흐름이라는 이중구속 상태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도시의 이항대립 상태의 판단불가능한 중간지대를 사유하고 되비추는 비저너리가 있다.
황혼은 서구 문명이 맞이한 밤으로 가는 여로이기도 하지만, 다시 말해서 ‘삶’이라고 표현되는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현실의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또다른 측면은 ‘살아감’이라는 구체적인 현실로서의 관철, 비서구적 시간의 판타스마고리아적인 개입이 이 황혼의 지대에서 발생한다. 오석근 작가는 이 대비되는 관철과 개입으로서 유유히 비상하는 카메라의 시선을 갖는다고 하겠다.
#4. “현대식 사고란, 한눈 팔지 않고 질주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빠른 속력을 경계하기조차 한다. 현대식 사고는 적절히 중간에 멈춰 서고 자기에게 가능한 수준까지만 가는 것이고, 자신의 주위를 둘러보고 확인하고 스스로를 느끼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페테르부르크 연대기> 중에서)
이 황혼 무렵은 어둠이 깔리는 가운데 퍼플톤으로 화해간다. 어느덧 퍼플톤으로 물든 오석근 사진의 공간감은 그 남루한 가난과 상층부의 부익부 사이의 수직적 배치 구도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차별하지 않듯이” 가득하다. 마치 영화 <기생충>에서 간밤에 내린 폭우를 맞으며 저 꼭대기 상층부에서 천국의 반대 계단을 따라 하강하여 저 아래 반지하까지 트래킹쇼트로 내려가듯이 이 사진 속의 첩첩한 건물군들은 (무)질서하게 계급사회의 속살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거기에 이 정직한 진실 자체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속살의 알 수 없는 잠재적인 것을 감추는 것으로서 퍼플톤은 거의 작가의 주인기표처럼 활용된다.
사실 퍼플톤은 역시 검은 색과 물로부터 유도되는 빛인데, 괴테 같으면 이 빛을 실제로 경험하기 위해 깊은 물 속에서 지상으로 시선을 향하기도 했다.(<색채론>) 또한 파형을 긋는 빛을 받는 부분은 녹색으로 보이고, 그늘지고 어두운 부분은 그 대립색인 퍼플로 피유도되어 나타난다는 경험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유도와 피유도에 의한 퍼플톤의 빛은 다분히 지평선[horizon]을 기준으로 출현한다.
가령, 고색창연한 역사를 함축하고 있는 공장의 대규모 설비와 건물이 저 너머 강한 빛의 빌딩과 대조되면서 사라질 운명에 처했는데, 그 빛은 퍼플톤이다. 작가가 피유도한 이 빛은 그대로 역사의 착종된 공시성 — 과거와 미래의 현재로서의 시간농축 —을 드러낸다. 현실인 동시에 환영이며, 근대도시의 토대로서 지지해온 과거인 동시에 곧 잔해더미로 우리 발 아래 깔릴 미래이다. 이 엇갈리는 시간(들)의 교호, 시간성의 얼굴이 이 특별한 빛으로 출현하고 있다면 지나친 말일까. 사실 이는 종교적 백그라운드가 필요한 현상학적 진술이자 평가일지 모른다.
필자는 오석근 작가를 통해서 인천[仁川]을 “아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인지하기 시작했다. 네바강 — ‘검은 강’이란 뜻 — 이 흐르는 이 도시는 영하 20도의 추위로 압축된 공기 속으로 황혼이 깔리면, 이 세계 전체가 노을빛의 꿈의 세계로 화해간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말하곤 했다. 뇌신경세포가 오작동을 일으키고 측두엽 발작이 나타나는 이 물과 빛의 판타스마고리아는 근대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즉 북위 60도에 있는 페테르부르크는 저 아래 50도에 있는 파리를 동경하고 모방해온 도시이다. 파리-모더니티가 스스로의 자율적인 진보를 거듭할 때도 페테르부르크-모더니티는 그 진보의 스텝을 학습하면서도 스텝이 꼬이듯 자신들의 고유한 스텝들을 색실로 섞어넣기 일쑤였다. 그 한 예로 프랑스 여행가 퀴스틴은 이 도시를 “바보 같은 모방”으로 망치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는데, 그에 반비판한 도스토예프스키는 <페테르부르크 연대기>에서 “페테르부르크는 그렇지 않다. 결코. 모든 것이 뒤섞여 있어 카오스처럼 보이질지라도 그것은 ‘살아감’의 약동이다.” 라고 외친다. 무차별한 혼종성과 두서없는 복제가 뒤덮이는 도시 페테르부르크가 어디를 가도 가짜뿐이고 훌륭한 건축물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는 어디를 가도 현재의 이 순간, 그리고 현재의 이상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모든 것이 카오스이고 모든 것이 뒤섞여 있을지라도 모든 것은 ‘살아감’의 시간에서 본다면 살아서 꿈틀대는 심장의 움직임이라고.
이러한 관점이라면, 오석근 작가의 입장에서는 그 모든 ‘페테르부르크’ 자리에 ‘인천’을 넣어도 무방하다. 북위 40도에 걸린 이 도시가 표방하는 인천-모더니티는 거의 엇비슷하게 페테르부르크-모더니티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단지 우리에게는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사람이 없었을 뿐.
#5. “오렌지는 향기롭게 너희들의 음미해 본 열매의 그 맛을 춤추어라! 오렌지를 춤추어라.” (릴케, 시집 <두이노의 비가> 중에서)
다시 오석근 작가의 사진으로 돌아가 보자. 이미 지붕과 천정에 구멍이 숭숭 나서 건축 내부로 외부의 빛이 난입해 들어온다. 그 빛은 기묘하게도 직사각형 형태의 모쥴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저 바깥은 검은 색과 쪽빛이지만, 실내는 다른 빛이다. 또 다른 사진. 장판지 아래의 켜켜이 드러나는 레이어는 일제 시대, 혹은 그 이전의 전통까지 보여주고, 그 주름상자처럼 끝없이 펼쳐지는 서슬에 문지방, 벽, 장롱, 천정 역시 스러져가고 붕괴되어가면서 약한 빛의 목소리를 관람자의 주파수에 정확히 맞춘다. 여기에 역사적 풍경으로서의 목소리가 있고, 증언이 환청되기 시작한다. 어떤 쓰레기더미, 어떤 집의 내벽에 비친 우연한 빛, 포크레인이 출동한 현장 등등에서도 이는 어김없이 들린다.
오석근 작가가 마치 페테르부르크에 사는 작가처럼 이 인천의 “살아감”의 움직임을 빛으로 조망하는 그 풍경이 걸리는 선을 지평선[horizon]이라고 한다면, 사실 실제로 지평선을 찍은 사진을 모델로 하여 그 파급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지평. 이 지평은 소실하는 선 뒤에 무한을, “무한등급으로 승격된 무한한 대로들의 총체”를 품고 있다.(크라우스, 디디-위베르만, 박용숙) 그러한 지평에는 밝아오는 여명의 빛이 감도는데, 이는 오렌지톤이다. 릴케가 오렌지더러 춤을 추라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오석근 작가의 사진 속에서 또다른 빛은 ‘살아감’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안무로서 수많은 디테일에서 이러한 춤을 엿볼 수 있다. 춤과 안무적인 것으로서 사진이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까마귀가 하늘 궁창을 유유히 날면서도 저 아래 마계도시이자 환영의 도시 인천을 새롭게 보여주는 오석근 작가의 사진 세계의 에센스라면 어찌할 것인가.
따라오는 거울 - 폐수에서 무지개 빛을 보던 그런 순간들
현시원 (시청각 공동대표, 독립큐레이터)
“어린 시절 내게 인천은 붉게 물든 하늘과 경인고속도로의 굉음 그리고 녹슬고 부식된 기괴한 기계들이 가득한 항구의 풍경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 시절 소극적이고 소심했던 나는 전형적인 철수로서의 장면들을 기억한다.” - 오석근
이 글은 2012년 오석근의 작업에 대해 쓴 비평문 <폐수에서 무지개 빛을 보던 그런 순간들>을 참고, 발전시킨 것으로 검정색 글씨는 2012년의글, 파란색 글씨는 2019년의 글이다.
자신들/ 인천들
오석근의 작업은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에 대해, 아니 자신을 둘러싼 겹겹의 레이어(layer)에 관해 질문하고 기억하는 작업이다. 여기서 ‘자신(self)’이 누구인가가 늘 다각도로 긴장감 있게 문제가 된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초상 사진인 동시에 사회적 풍경 사진이 된다. ‘꾹 눌러 찍은 압착물’이라는 점에서 사진이 아닌 그의 작업들로 사진이라 불러보자. ‘자신을 찍은 풍경 사진’이라니, 무슨 말인가. 형식은 바깥을 담는 풍경화이고 내용은 자신을 담은 것이라고 말해보자.
타자에 의해 명명되는 ‘자신들(selves)’과 사회 체계 안에서 훈육되고 구성된 주체의 표상이 오석근의 사진 작업 안에서는 다시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온다. 오석근의 최근 프로젝트 <인천>(2018~), <한국의 풍습>(2012~)과 2006년부터 진행된 <교과서(철수와 영희)> 연작에 이르기까지 작가는 누구도 쉽게 범할 수 없는 거대한 이미지와 단어를 제시해놓고 그 안에 꽁꽁 얼어버린 스테레오 타입(stereotype)들을 요리조리 굴린다. 한국의 풍습과 교과서, 개항도시 인천이라는 말을 다시 발음해본다. 개별 사진 한 장이나 단일한 작품의 제목이 되기에는 거대한 개념이 아닌가. 부르면서 사라져야만 하는 그런 거대한 단어다. 되어야만 하는 사람, 배워야만 하는 습관들, 알아야하는 인사말, 처음 만나는 이에게 해야 하는 반갑다는 관습, 둘 이상의 공동체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들 안에 수많은 사례(cases)들로 담겨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한 사회의 이러한 사례들을 체화해야 한다! 특정 공간과 시간대 안에서 말이다.
오석근은 철수와 영희가 활보하는 교과서와 한국의 당대 풍습이 담긴 20세기 초 일제엽서라는 ‘교본’을 반추하고 반성한다. 그럼으로써 오독된 시선의 역사를 다시 구성해낸다. 그는 사진가의 눈을 가진 동시에 이야기를 들어주고 담아내는 ‘담화자’의 시각을 가졌다. 수집가로서의 면모와 활동가로서의 면모 중에서 나는 일단 수집가인 오석근을 먼저 사진으로 보았다. 그의 사진은 파노라마적이다. 시간을 다루는 방식에서 해당 공간이 깊게 개입한다면(빛바랜 공간과 흩어진 사물들), 사진에 깃든 색채 감각을 보는 것도 중요하다. 유년기의 놀이에 숨겨진 폭력성을 들춰내듯이, 또 하루해가 뉘엿뉘엿 질 때의 하늘이 보여주는 변화무쌍한 카멜레온의 색깔들을 들여다보듯이 오석근의 작업에는 어느 한 순간의 무엇에 관한 것이라 규정하기 어려운 감정과 배경들의 뒤섞여있다. 사진에 담긴 자연의 색채와 공장, 낡은 집이 만들어낸 폐기물 섞인 사물들이 만들어낸 색채는 한 화면에 공존한다. 이 ‘뒤섞여 있음’에 핵심이 있다. 한 마디로 담아낼 수 없는 시각적 이미지가 작가 오석근이 체험으로써 알고 있는 경험/지식들과 혼합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가능해질까. 다시 보고 읽어내야만 하는 시간이 그의 사진에 찾아온다. 그의 작업은 대한민국 교과서의 주인공인 ‘철수와 영희’들을 비롯한 축적된 역사를 극단에 밀어내고 위반하는 작업이며 이를 ‘다시-읽기’ 하는 작업이다. ‘다시-읽기’ 하는 데 얼만큼의 시간과 또 공간이 필요할 것인가.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필요하다. 이쯤에서 우리는 오석근의 작업을 이렇게 몇 마디 단어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은 도시 ‘인천’ 때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도시 인천을 통과한 시간대를 보기 때문에, 그는 두 발과 팔로 이동하여 직접 경험한 것들을 필터링한다. 그의 작업이 그가 태어난 도시 인천을 배경으로 한 ‘지정학적’인 작업이며 또한 이 지정학을 넘어서는 공통의 감각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이 ‘뒤섞여 있음’의 다층성이 발현된다. 고향이면서 ‘낯선 곳’으로서의 타지인, 외래 문물이 처음 들어온 도시이자 여전히 100% 발전되지 않은 개발-도상국적인 마을로서의 인천을, 오석근은 바라본다. 개항지로서의 역사를 사진으로 적어내는 오석근의 사진에는 다층적 시간대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시 적어보자면, 풍경화의 형식에 수많은 ‘나들(I의 복수 형)’이 새겨진 초상화의 내용을 빗대어 그가 보는 많은 인천들‘이 인화되어 있다.
감정의 역사에 관해
사실 오석근의 작업에 담긴 훈육제도에 대한 발언이나 정치현실에 관한 고찰들을 읽어내는 일보다 눈에 처음 들어오는 것은 사진 구석구석에 알알이 박힌 알싸한 감정들이다. 이 감정들은 오석근이 설치해놓은 사진 구도 안의 배경과 오물쪼물한 사물들 사이에서 피어난다. 인천 프로젝트 이전에 그가 집중했던 교과서 프로젝트에도 대한민국의 역사가 있다. 굳어진 역사를 한 어린아이 개인에게 처음 누군가 알려줘야만 할 때, 역사가 들어가야 하는 진입로로서의 상처가 생긴다. 이 상처는 자신이 타인과 타지와 만나는 뼈아픈 통로가 된다. 철수와 영희가 쭈그리고 앉아있거나 이상한 짓을 당하거나 벌이고 있는 순간들 뒤로 시간의 때가 묻은 벽지와 이불장의 디테일한 장식들이 눈에 들어온다. 2019년 작가가 진행한 인천을 촬영한 사진들에는 이러한 공간의 디테일들이 전면으로 나타난다. 전면화된 장식, 전면화된 공간의 틈새에 다층적인 물리적 해결책들이 보인다. 일본집, 흑벽, 삐져나온 대나무들. 과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시간은 가버렸지만 공간의 흔적들은 여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있다. 전혀 관리되지 않은 채 나뒹구는 공간의 흔적들을 오석근은 수집한다. 작품 <교과서 p.19>(2006)에서 보이는 검은 옷장과 영희가 숨어있는 공간 안으로 보이는 주홍색 비단 이불, 작업 <교과서 p.269>(2008)의 배경인 철근냄새 물씬 풍기는 해 지는 부둣가의 풍경은 오석근이 몸담은 시공간의 디테일이자 그가 설치해낸 ‘기억-재생의 무대’다. 맞다, 오석근이 이번 인천 프로젝트에서 클로즈업하여 잡은 것은 철근냄새, 사는 냄새, 온갖 갖은 ‘문양’들이 상처가 되고 있는 과정의 이미지 산물들이다. 기억을 재생시키는 무대라는 이 이상한 말은 특정 장소에 가면 뒤통수가 얼얼한 듯, 찾아오는 한웅큼의 기억들이 있다는 말이다. 그 무대에 우연히든 계획적이든 찾아가고(보게 되어서야) 기억나는 복합적인 과거의 상태들이 있는 것이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나아가 1970년대와 2012년의 지금(이 글의 일부분을 완성한 시점은 2012년이었다. 2019년에 다시 쓰기 시작해 2020년 전체 글을 완성한다.)이라는 혼성적인 시공간을 복합적으로 보여주면서 작가는 ‘시각이 기억해내는 기억들’의 장치를 작동시킨다. 지나간 엔터테인먼트와 복고취향을 호출해내는 오석근은 직접 재래시장에서 수집한 버너큘러(vernacular)한 의상들과 소품을 취하고 구성하는 재능을 보인다. 그가 자주 듣는다고 내게 말해주었던 음악들, 그것은 2020년을 바라보는 한국의 취향에 삑사리를 내는 곡조와 리듬들이었다. 의상과 소품을 취하는 그가 ‘수집’과 ‘버너큘러’를 한데 붙여놓았을 때, 오석근은 연출이 아닌 수집의 보편성(universality)을 획득한다.
좀 더 써보자. 오석근은 사진과 설치 작업을 통해 무엇인가 일부러 어색하게 ‘연출’하는가? 아니다. 그는 수집한다. 이전의 시간들에 파생되었던 문양들과 파편들, 낡아빠진 시간의 부산물(artifacts)들을 수집하는 것으로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2019년 11월 15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오석근 개인전 2부 《인천》에 공간을 채웠던 사진들을 떠올려보라. 바닥에까지 닿은 사진들은 인천의 실내외 공간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 가설무대 같은 임시적은 가짜 현실을 드러내는 위장막이 아닌 진짜의 시간들을 목격하게 한다. 세로로 프레임화된 사진들을 보는 데 어지러운 것은 왜일까. 수직적으로 길게 프레임화된 사진들은 긴장감, 무엇인가 추모하는 느낌, 파편적으로 재구성된 공간의 일부들을 ‘타이트하게’ 보여준다.
그의 이전 작업들에도 무대가 있었다. 완벽하게 꾸며진 연극 무대가 아니라 길거리라는 현실 배경을 주 무대로 하면서 작가는 철수와 영희를 연기하는 퍼포머들을 현실과 허구의 지렛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려놓는다. 작가가 세워놓은 이 무대 위에는 과거를 살았던 청소년들도 현재를 고민하는 아이들도 찾아온다. 현재 청소년기를 보내고 있는 학생들의 초상 사진과 근대기 청소년들의 사진 도큐먼트가 함께 구성되는 작업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2009~)에 있는 청소년들을 보자.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는 청소년들이 가진 ‘날 것’의 존재감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이 날 것의 긴장감과 존재감은 오석근의 작업이 갖고 있는 특성이기도 하다. ‘사춘기-스러운’ 복잡 다다한 감정을 억지로 묶어 내거나 삭제하지 않고 감정들과 기억들의 복수체계로 존재하게 하는 것 말이다. 감정의 역사를 이제 스스로 막 챙겨가기 위한 어리면서도 커가는 존재들에게 ‘복수체계’의 감정들이란 싸우면서 만들어진다. 나와 내 바깥과 동시에.
얼굴 없는
그 감정들을 가진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이전 작업들을 통해 살펴볼 차례다. 한 인터뷰에서 오석근은 철수와 영희 작업을 하며 소설 <파리대왕>(윌리엄 골딩)에 등장하는 소년들을 언급한 바 있다. 덜 자란 미성숙의 모티브이면서도 실은 독립된 주체로서 자기완결성을 지닌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이제 성인이 된 오석근에게 끈질기게 따라붙는 질문의 대상이다. 그가 보았던 것을 복구해내고 기록해내며 작가는 자신이 발 딛고 선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한 시정(是正)의 시간들을 보낸다. 오석근의 카메라에서 타자의 이미지는 자신의 이미지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철수와 영희라는 주체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오석근은 가면과 코스프레를 장치로 삼아 알기 힘겨운 무표정의 이미지들로 둔갑시킨다. 철수와 영희는 어린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들이 뒤집어쓰는, 하지만 표정은 결코 방송용의 밝고 화사한 것이 아닌, 거대한 가면을 쓰고 무표정한 눈코입을 갖고 있다. 퍼포머의 얼굴은 무척 크지만 모든 얼굴 근육과 표정이 사라짐으로써 ‘얼굴 없는’ 대상이나 마찬가지다. 거대한 얼굴이 막상 얼굴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가장 뻔질나게 얼굴을 내보이며 규정하기 쉬운 대상이었던 철수와 영희를 가장 알기 어려운 대상으로 교란시키는 것이다. 개인에게 남은 강박과 트라우마는 얼굴 표정이 사라졌기에 한 순간의 일화로 휘발되지 않고 인물 뒤의 배경과 대기와 함께 더욱 생생하게 살아난다. <한국의 풍습>(2012~)에서도 지난 시기 조선을 살았던 이들을 연기하는 퍼포머들은 오석근에 의해 다시 한 번 그때 그 순간을 살아가는 의상과 매너들을 기억해낸다.
물론 오석근이 오랜 시간 대화 수단으로 삼은 철수와 영희 등은 ‘나’ 또는 이에 상반되는 ‘타자’로 치부하기엔, 대한민국에서 교과서를 읽으며 자라난 세대에게는 치명적인 대상이다. 남으로 돌려버리기에는 너무도 나의 모습과 가까워 떨어지지 않는, ‘따라오는 거울’과 같은 대상이 오석근에게는 또 있다. 내가 아니라 거울이 따라온다면? 바로 인천이라는 시공간이다. 작가는 인천을 상징화하는 어떤 기념비적인 작업이나 사회과학적인 리서치를 작업에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인천 주민들을 직접적인 대화상대로 삼거나 조사하고 대상화하기에는 제 피부처럼 가까운 인천의 한 자락에서, 작가 오석근은 인천의 파편들을 수집하고 이 파편들 사이에서 인천의 오묘한 공기와 부스러진 형태들을 억지로 고체화하지 않으며 액체처럼 섭취한다. 그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이 이미 인천사람들이고, 매일 인천의 사운드를 듣는다. 공장과 바다, 부둣가의 거대한 구조물들과 문화적인 취향들, 인천을 활보하며 오석근이 보았던 유년시절의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풍광들은 그가 다시 근대의 문화사를 탐구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된다. 녹슨 기계들의 굉음과 바다 소리를 함께 들으며 자랐던 오석근에게 100% 정형화된 도시도 농촌도 아닌 다면적인 도시에서의 경험과 숱한 이동들은(동티모르 파병, 일본에서의 직장생활 등) 그에게 지역성을 탐구하게끔 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오석근에게 그가 아카이브하고 새롭게 촬영하는 이미지의 출처는 그런 점에서 그의 이동과 맞물려있다. 이 이동 안에서 그는 흡수와 분출과 망각이 가장 빠른 도시 중 하나인 근대기의 인천, 나아가 과거부터 미래까지의 인천을 바라보고 또 노래한다.
오석근은 기존 이미지의 재현과 구성에 재구성으로 맞서며 ‘기억하기’의 문제를 수행한다. 대중 매체와 소셜네트워크 등의 확장으로 많은 것들이 순식간에 이야기되고 흩어지는 현 상황에서 오석근은 사라지거나 쉬 잊혀지는 것들에 관해 수집하고 대화한다. <서해 프로젝트 니나나나>(2011~)에서도 오석근은 서해의 여러 섬을 방문하여 연평도, 백령도, 대청도 대기의 알싸한 리얼리티를 누그러뜨리지 않는다. 연평도를 비롯한 서해 크고 작은 섬들을 찾은 작가는 스마트폰으로 108장의 사진을 기록했고 이곳의 트마우마와 가까운 상처들을 기록하고 또 이 기록의 행위에 관해 자신을 향해 질문한다. 연평도의 한 가정집에서 깨진 거울을 가져온 작가는 예민한 빨간 글씨로 ‘어차피 기억하지도 못할 거면서’라는 문장을 새겨 넣는다. <연평의 거울>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은 누구를 향한 질타나 보고가 아니기에, 연평도를 찾아 사진으로 기록한 작가 자신을 향한 반문이기도 한다. 그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특정 사건과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기억의 방식과 파편들이다. 또 하나 기억을 다루는 작업이 존재한다. 최남선의 시에서 이름을 따온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2009~)는 여러 작업들이 겹겹을 이루는 프로젝트로 그는 현재 학교를 다니는 교복을 입은 청소년들의 사진을 찍고, 또한 소년이었으나 지금은 다른 시절을 보내고 있는 돌아가신 아버지와 자신 그리고 인천 주거자들의 앨범을 수집하여 기록했다. 소년이었던 이들에게 바치는 비가(悲歌)는 방치된 시간들에 대해 작가가 대항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오석근이 아카이브한 파편들은 인천의 대기에서 액체처럼 흘러들어가고 엮어 ‘지금’을 구성해낸다.
따라오는 거울
인천과 근대라는 사회적 시공간은 오석근에게 무엇일까. 그에게 인천은 복잡 다다한 보물섬과 같은 창고이며, 자신을 배태시킨 호기심과 갈등, 앎의 과정이 뒤섞인 양탄자다. “바닷가에 있던 철조망”과 “어느 날 너무 아름다운 색깔을 보았는데 그게 가까운 공장에서 나오는 폐수였다”는 작가의 말은 그가 재구성해낼 근현대사의 여러 컨텍스트를이 사적인 감각의 경험담을 통해 생생하게 증언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2011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재와 먼지(灰塵 :회진)>에서 오석근은 인천의 독특한 건축물을 향해 보다 적극적으로 직접 찾아 나선다. 인천 중구에서 볼 수 있는 근대 시기의 독특한 건축물들을 기록하고 인천중구 거주자들의 앨범에서 찾은 사진을 변형시키면서 겹쳐지고 어긋나는 시간대를 살았던 수많은 이들의 ‘중첩’된 기억을 발굴해내는 것이다. 장소에 숨죽이고 있는 이상한 문화적 상처와 혼용들을 그는 기록하고 채취한다. 여기에 쌓인 먼지들을 훅 하고 털어내지 않고, 먼지들을 직접 움직이게 하고 어딘가로 이동하게 하는 오석근의 작업은 먼지로 규정된 밑바닥의 것들을 다시 꿈틀거리게 하는 자극제가 된다.
오석근의 작업 안에는 그의 질문들과 삶의 배경, 다채로운 취미와 걸으면서 지나치는 인천의 많은 단상들이 한 데 다층적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가 즐겨듣는 흥이 넘치는 옛 가요와 최신 음반까지 수없이 많은 생활의 단서들이 숨겨있다. 직접적으로 제 생활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그는 어쩌면 자기 생활과 작업을 한데 엮어 투명하게 일치시키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개인사의 배경과 출처를 탐구하면서 그 안에 담긴 오해와 망각을 풀어헤쳐보려는 작가의 관심사는 고립과 악전고투 속에서 사회적으로 방치된 파편적 기억들과 쉽사리 타협하지 않는 행위이다. 2012년 작가가 진행한 <한국의 풍습>은 리서치 아카이브와 퍼포먼스가 결합된 작업으로 렌즈에 담기는 사진이 어떻게 구성되는지 를 작가 스스로 실험해보고 진행해보는 작업의 연장선에 있다. 한 세계를 알려주는 방식으로서의 교과서와 엽서, 앨범 등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어떤 방향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기억하라고 주입한다. 그러나 작가가 불러내는 과거의 기억들과 현재의 트라우마가 누구의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의 공통감각이 어딘가에서 끝없이 모두에게 ‘흘러내리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작은 역사
오석근은 인천을 찍고 움직이고 노래를 틀고 사람들을 만난다. 나는 오석근의 ‘사진’에 대해서 집중하여 말하고자 책상에 앉는다. 그 사이 춥고 더운 날이었던가. 오석근의 사진이 걸려있던 몇 번의 공간을 종종 걸음으로 찾아가 사진을 보았다. 그의 사진 뒤로는 항상 공간이 보였다. 얼음을 파는 공간이었다가 전시장으로 되었던 공간(2018년 겨울이었다!) 전시 공간의 이름은 ‘옹노’ 였고 그 옆이 ‘인천아카이브 까페 빙고’였다고 작가는 정확히 알려준다. 거리에 얼음이 밟히던 겨울날이었는데 ‘옹노’라는 이름은 박태원의 고현학 ‘옹노만어’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전시공간 옆 빙고라는 이름은 왜? 말 그대로 얼음을 저장하던 창고, 1939년 만들어진 인천 얼음 창고였다. 인천의 역사를 기록하는 기념관, 오석근이 들고 움직이는 카메라에 사진이 담겼고 그 사진이 찍히는 공간이 담겼다. 오석근은 사진을 찍기 위해 공간을 볼까? 공간을 보기 위해 사진을 찍을까?
오석근의 사진에서 공간이 눈에 밟히는 까닭은 오석근이 사진을 전시장에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기인한다. 그는 사진을 정면의 기념비적 설치가 아닌 다소 주춤하듯, 어딘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가 부분부터 하나씩 꺼내 보내주는 형태로 조심스럽게 사진을 드러낸다. ‘옹노’에서의 전시는 사진 설치 방식이 흥미로웠다. 그가 찍은 사진은 바닥에 놓이기도 하고,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도 하고, 때로 널부러진 사물들마냥 어딘가에 그냥 존재한다. ‘행동이 아닌 존재’라는 말을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까? 그냥 있던 사진? 그냥 있기’로서의 사진? 그가 찍은 사진들의 깨알같이 디테일한 패턴들이 공간 밖으로 나올 때 그 사진 속 공간은 소리치기-보다는 공간 뒤로 숨는다. 이 사진은 빠닥거리지 않고 녹슨 철제 조각의 느낌이 나며, 빛나기보다는 눅눅하다. 이전부터 그랬지만 그가 역사를 다루는 방식은 ‘감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어떤 사건들 자체보다는 해당 공간이 붙들고 있는 거친 흔적들의 ‘파편’을 통해서 감정들의 격함이 식어버린 빈-부대들을 다룬다. 너무 쨍-해서, 혹은 도무지 짠-하다는 것밖에는 남은 게 없어서 다가가기 힘들었던 정면 샷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오석근의 사진은 다르다. 비어있는 무대인데, 정보 가치들이 너무도 높은 이름 없는 공간들을 다룬다. 인천이지만 그곳은 인천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한 관찰은 내가 전시장을 찾았던 오후에서 저녁으로 해가 지는 시간 때문이었을까. 주로 추운 날 오석근의 사진을 보러 갔던 기억이 난다. 오석근이 사진을 전시장에 배치할 때, 그는 오랫동안 천착해온 인천을 낯설게 보고 다시 눈 씻고 보듯이 파편에서부터 바라본다. 이 공간은 공간 안에 공간을 짓는 행위로부터 파생된 곳이었다. 아슬하게 기대어있는 듯한 사진들, 계단을 올라가서 시야를 달리하여 본 사진들. 오석근이 만든 일종의 ‘가설무대’인 셈이었다.
나는 지금 발터 벤야민의 글 「사진의 작은 역사」를 생각한다. 1930년대에 쓴 벤야민의 이 글에서 그는 지금 그의 눈앞에 놓인 유행하던 사진 기술이 아닌 1850년대, 그러니까 사진이 발견된 초기의 사진으로 돌아가서 이야기한다. ‘작은’ 이라는 이름에 대해 나는 지금 생각한다. 오석근이 촬영한 인천의 역사도 ‘작은’ 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그물망같은 역사 아닐까. 작은 것들이 건져질 수 있도록, 거대한 그물망을 지속적으로 던짐으로써 오석근이 잡고자 했던 것은 ‘작은’ 역사다. 작은 파편에서부터 출발함으로써 오석근이 이 길다면 긴 시간동안 찍어온 고향 인천은 커다란 이야기로 용솟음 친다. 화산이 쉬었다가 폭발하듯이 오석근이 품고 있는 어떤 의아함이, 긴 시간동안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작은' 역사들을 찍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발터 벤야민의 그 글로 들어가 보자. 벤야민이 쓴 「사진의 작은 역사」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1931년의 시점에서 사진 기술이 발견된 초기의 시간대를 ‘작은(small)’ 시간대로 읽어내는 것에서부터(물론 벤야민은 그가 보았던 1930년대의 스펙터클한 사진을 싫어했다) 일부분에 불과한 단서(little)들을 가지고 사진의 역사라는 거대한 선형적 시간에 한줌의 시간대를 부여해보는 것에 이르기까지. 작은 사진의 역사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광부의 광석처럼 깨갈 것이 남아있는 지대다. 오석근의 인천 사진에서 벤야민의 글에 기댈 수 있는 부분은 지금 글을 쓰는 내게는 ‘주춤거림’으로서의 태도다. 글에서 벤야민이 묘사하는 그 꼬깃꼬깃한 옷을 입은 한 철학자의 초상 사진을 보자. 한 철학자의 초상 사진에서 벤야민이 그러나 본격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진이 담아낸 디테일한 옷깃이 아니다. 사진에 담긴 것은 눈에 묘사되는 디테일이 아니라, 사진을 찍는 카메라로부터 살짝 ‘물러나 있고자’하는 촬영자의 태도다. 나는 이것을 ‘모르는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내 눈앞에 있는 어떤 까만 물체가 무엇을 해낼 지 완벽하게 모르기 때문에, 나는 카메라로부터,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살짝 물러나고 주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러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오석근은 그의 고향이자 누군가에게는 영원한 타지이기도 한 한 도시를 오래 볼 수 있는 것 아닐까.
오석근이 요 근래 제작해 전시장에 배치한 사진들은 세로로 길다. 수직적 파노라마는 오석근이 마주하는 인천이라는 도시에 몸의 형태를 부여한다. 사람같이 서 있는 이 사진들은 오석근이 말한 바 ‘다 담을 수 없음’을 보여주는 수단이다. 전시장에 있는 사진들은 정말이지 얼굴 없는 사람같은 큰 키의 우뚝 선 사람, 인체 비율을 갖고 있다. 한 사람은 그게 누구이든지 간에, 자신이 살아있는 시간 만큼만 한 도시를 보고 느낀다. 한 도시에서 자라고 배우며 도시의 냄새를 맡는다. 이 냄새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떤 색채들을 만들어내는지 오석근의 사진은 인천에 살았던 많은 이들의 시간 공간 사물을 결국에는 수집하는 방식을 고안해내는 것이다. 나는 이제 여기서 두 개의 단어를 생각하며 이 오래 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인천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 (1) 인천 : 오석근의 사진에서 인천은 시간성의 상징이다. 그가 잡은 인천의 역사는 오석근이 태어난 1979년, 그리고 그가 오랜 시간 지켜봐온 시간과 더불어 다른 이들의 사진에 담긴 시간들까지 합쳐진다. 시간은 수직(선형적 시간)과 수평(다른 이들의 시간)과 합쳐지며 이상한 그래프를 그린다. (2) 무늬들 : 두 번째로 그의 사진에 깃든 무늬들. 무늬들 : 그의 사진에서 무늬는 벽돌, 전선줄이 긋는 가로줄 세로줄. 인천이라는 도시와 그가 사진으로 그어놓은 무늬들이 있는 하나의 거대한 공간을 상상해본다. 시간은 흐르고 가버리지만 공간은 계속 앞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나는 오석근의 이 세로로 긴 인천을 찍은 사진들이 있을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해본다.
인천 속 ‘인천’, 송도에서 배다리로
민운기(스페이스 빔 대표)
이번 전시의 1부가 열렸던 인천도시역사관. 송도‘국제’도시 내 센트럴파크(‘중앙공원’이 아니다)를 끼고 서 있다. 송도국제도시는 무엇인가? 인천시가 경제자유구역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청라와 영종지구와 함께 건설한 ‘글로벌’ 계획도시다. 경제자유구역조성사업은 무엇인가? 인천시가 기업주의 도시경영 관점에서 “도시경쟁력 확보”를 위한다며 벌이는 또 다른 자본축적 전략으로, 광활한 갯벌을 매립하며 이곳에서 오랜 세월 삶을 일궈온 어민들을 쫓아내고 추진한 대규모 개발프로젝트다. 이를 위해 인천시는 사업 성패의 관건이 되고 있는 외국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어줌은 물론, 제반 여건 및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주거, 상업, 의료, 교육, 문화, 관광, 쇼핑 관련 최고급 시설과 환경 조성 비용에 천문학적인 시민의 세금 및 토지 매각과 아파트 개발 이익금을 쏟아 부어 왔다. 그리고 지난 2009년에는 당시의 시장이 이를 포장하고 시민들에게 장밋빛 미래도시에의 환상을 심어주기 위해 거액을 들여 인천세계도시축전 행사를 열기도 했다. 이에 앞서 도시의 이미지를 좌우하는 공간 및 건축 설계에도 많은 공을 들여 이를 더 돋보이게 하고 눈길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 이색적인 건축물들을 여러 개 세웠다. 현재의 인천도시역사관은 바로 이때 투모로우시티, 트라이볼 등과 함께 세운 인천도시계획관이다. 그리고 그곳의 1층에는 도시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입체영상관과 상설전시관을, 2층에는 당시의 시장이 꿈꾸었던 사통발달 도로망을 비롯한 고층 빌딩과 아파트 일색의 인천시 미래 모습을 담은 인천모형관을, 3층에는 인천경제자유구역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IFEZ모형관을 꽤나 큰 규모로 설치해 놓았다.
이런 곳에서의 전시라 하면 당연히 이러한 도시 분위기에 어울리는 세련된 고품격의 작품으로 한껏 뽐내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시장인 2층 다목적실 소암홀로 시선을 던지는 순간 보란 듯이 기대를 접게 만드는 수직의 사진 이미지 작품들이 전시 공간을 점령한 채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이미지 안에는 정말 이 도시와는 어울리지 않는, 애써 보고 싶지 않을 장면들이 날것으로 담겨 있다. 버려지고, 갈라지고, 부서지고, 구멍 나고, 썩어나가는, 휘황찬란한 도시의 이면 속 후미진 곳, 외면 받은 곳, 한 때의 역할을 뒤로 하고 주인에게 버림받은 곳(것들)이다. 보니까 개발을 위해 철거를 앞둔 곳들의 온기 잃은 파편적인 모습들이 상당 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엄연히 ‘인천’이라고 하는 도시를 구성하고 있는 한 요소이다. 그리고 이를 좀 더 들여다보면 오늘의 인천이 지닌 본래의 모습과 상황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좀 더 쾌적한 주거 환경을 위해, 때로는 개발과 입주 후의 차익 발생을 기대하며 지나 온 자신들의 과거 역사와 삶을 기억하며 보둠을 생각이 없이 가차 없이 허물고 지워버린다. 이들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도시인의 꿈과 욕망에 의해 부정 및 거세당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죽지 않고 이곳 송도국제도시에 출몰, 한 자리를 차지하고 버티고 서서 자신의 존재를 말하고 인천의 오늘을 제보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옆 공간에는 이를 가리고 지우고자 했던, 10년 전 시장이 만든 인천모형관이 예전만큼의 관심과 활력은 없지만 이를 듣고 있는지 모른 체 하는지 여전히 불빛을 깜박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전시 상황이 참으로 묘하다. 사실 단 하나만의 논리와 욕망으로 만들어지고 가동되던 이곳이 10년이 지나며 상이한, 아니 대척점에 놓여 있는 주체의 또 다른 시선과 태도가 끼어 들어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한 채 무언의 발언을 하고 있고, 한 때 야심찬 한 권력자의 비호 속에 당당했던 공간과 그 속의 이미지는 주인을 잃은 채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니, 한 시대를 주름잡던 권력자의 사고와 욕망을 너무나 솔직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유물’이 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은 이제 시효를 다한 것일까? 아니다. 전시 작품 속 이미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도시 곳곳에서 과거를 부정하며 또 다른 유토피아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여전히 살아남아 있다. 어찌 보면 그 둘은 같은 꿈을 꾸는 공모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를 달갑지 않고 불편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주체가 있다. 그리고 이 모형관까지 얼떨결에 떠맡게 된 도시역사관 운영 주체들도 문제의식을 같이하고 있다. 송도국제도시에서 육지 쪽을 바라보면 보이던 오래된 어촌마을이 도시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았는지 모두 철거하고 고층 아파트 숲으로 채운 소암마을을 이름으로나마 다시 불러낸 ‘소암홀’에 이러한 작가를 초대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한 도시 속 건물에 태생이 다르고, 입장과 위상이 다른 주체와 그들에 의해 드러난 시각적 이미지들이 애매한 관계 양상을 보이며 공존하고 있다. 이렇듯 획일화되고 전제적이었던 도시는 10년의 세월 속에 분열상을 드러내며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인천의 본모습이며 하나의 축소판 아닐까. 그리고 작가가 드러내 보이고자 의도한 것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전시 작가 오석근은 지배 권력이 행하는 각종의 통제와 관리, 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담론과 장치, 기제에 대해 이를 발견하고, 드러내고, 지적하며 예술적 저항을 시도해왔다. 그에게 국가 및 자본, 계급 권력은 그 자신들의 통치와 기득권적 질서 및 이익을 공고히 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관점에서 사건을 일으키고, 조작하고, 왜곡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다수의 관심을 때로는 노골적으로, 때로는 교묘히 차단하거나 또 다른 언어와 이미지로 포장하곤 한다. 그들의 이러한 전략과 전술에 말려들거나 순응할 경우 대다수 구성원들은 이의 또 다른 재생산자가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러한 의도와 과정이 생각보다 순탄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당사자들 간에 또 다른 갈등과 충돌, 반목이 뒤따르고, 개인 안에서도 굴절되고 강박적인 심리로 남기도 한다. 오석근은 권력이 행하는 다양한 측면과 방법 그 자체는 물론, 그것이 행해지는 과정과 그로 인한 결과 등 폭 넓은 스펙트럼 속 다양한 영역에 걸쳐 전 방위적인 관심과 개입을 통해 그 이면을 주시함은 물론, 이렇듯 진실과 진상을 가리거나 오도하는 언설과 장치, 기제에 대해 대항한다. 그 방법 또한 사진으로만이 아닌, 사운드와 텍스트, 몸짓, 축제와 이벤트를 넘나들고, 예술과 제도, 행정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이를 통해 삶의 현장과 제도화된 전시 공간을 넘나들며 기존의 공고화된 영역과 경계, 관습화된 사고와 감각을 흐트러뜨리며 또 다른 방식의 재구축 가능성을 타진한다. 이는 그에게 예술이 단지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하기 위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선 현실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한 개인과 지역, 도시, 국가는 분리할 수 없이 맞물려 있는 동일운명체이다. 오석근은 그 속에서 보다 자유롭고 해방된 주체적 삶을 꿈꾸다 보니 그가 출생하고 성장했다는 이유와는 별개로 현재 ‘살고 있는’ 곳으로서의 ‘인천’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에 그에게 있어 ‘인천’은 자신 및 안팎에 대한 해명을 위한 구체적인 탐구 대상이자 예술 실천의 현장이다.
앞서 인천 관련 상황을 일부 언급했지만 그 범위를 확장시켜도 별반 다른 게 없다. 주지하다시피 인천을 시간적으로 보면, 가까이는 제국주의 시대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친 후 분단과 냉전 체제 속에서 군사 독재와 압축적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과정 속에 놓이며 굴곡진 한국 근ㆍ현대사의 영욕을 함께 해왔다. 공간적 또는 지리적으로 보면 한반도 서쪽 황해를 낀 바다도시로 다양한 문명권과의 교류가 이루어진 요충지였고, 개항 이후에는 서구의 문물이 경성으로 가기 위한 관문이었고, 산업화 시기에는 수도 서울의 주변부 도시로서의 기능을 본격 담당해왔다. 그렇지 않은 도시가 없겠지만 특히 인천은 이러한 시ㆍ공간적 배경과 흐름 속에서 지배세력은 자유롭고 주체적이지 못한 채 외부의 시선과 논리에 무방비 상태였다. 아니 오히려 이를 더욱 추동하며 내면화 해왔고 이에 바탕 한 도시를 계획하고 미래를 꿈꿔 왔다. 평화와 화해, 인권, 생명, 공동체의 가치와 이념보다는 반공과 대결, 자유민주주의, 발전과 성장, 효율, 개발주의 논리가 팽배하다 보니 역사의 희생과 아픔을 보듬어 안기보다는 배제하거나 지우려 하고, 천혜의 자연 유산은 또 다른 개발 논리로 파괴 및 훼손하고, 근대 역사 문화 산업의 자산과 흔적은 지우거나 또 다른 돈벌이를 위해 치장하곤 한다. 오랜 동안 이어온 공동체와 주거지는 좀 더 편리하고 쾌적하고 나아가 더 많은 이익에 대한 기대 심리로 획일적인 아파트 단지로 바뀐다. 지극히 자기 부정과 탐욕의 논리가 팽배해 있다. 그렇지만 위정자들은 장밋빛 청사진과 화려한 언술로 이를 호도하고 유혹하며 ‘이곳’이 아닌 저기 먼 미래로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이곳 인천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남다른 촉수를 지닌 오석근을 비롯한 당대의 작가들에게 이런 모습이 좋게 다가오고 비춰질 리 없다. 아니 이런 비정상적인 도시도 없다. 마계인천(魔界仁川). 그들이 자주 쓰는 명칭이다. 상식적인 사고와 판단, 논의가 통용되지 않고 저마다의 온갖 뒤틀린 사고와 욕망이 뒤엉켜 부딪히고 꼬여 있는 곳. 물론 인천에 대해 자조적이고도 뒤틀린 시선을 드러낸 일부 계층의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오히려 현재의 인천을 이처럼 적절하게 표현하는 명칭도 없다는 생각이다. 이에 이를 나무라고 외면할 것이 아니라 이런 부분에 대해 함께 마주하고 고민하며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가 아닐까.
이러한 문제의식의 발로이자 그러한 관점에서 ‘인천’의 지배적인 사고와 욕망이 숨기고 싶은 모습과 상황을 담은 ‘인천’ 관련 이미지 작품들이 2부 순서로 인천의 구도심인 동구 금창동 배다리마을 내 인천문화양조장으로 옮겨 왔다. 배다리는 송도국제도시와는 또 다른 곳이다. 바로 송도의 욕망을 위해 마을을 갈라놓고 파괴하려 했던 곳을 주민들과 시민들이 나서서 막고, 이곳이 지닌 역사 문화 자산과 가치에 주목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주민 주도의 마을, 돈의 논리가 아닌 삶의 논리로 도시의 대안을 찾아가려는 곳이다. 인천문화양조장 또한 70년 기간의 막걸리 생산 공장 가동이 중단되며 폐허화되다시피 했던 곳을 민간이 임대하여 보듬고 또 다른 가치를 더하여 다시 살려낸 곳이다. 이곳에 1부 전시 작품 이미지에다가 동일한 맥락의 이미지가 추가되어 소개되었다. 송도국제도시 내 도시역사관과는 또 다른 배치와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사실 이미지는 말 없는 기표이다. 그것은 장소에 따라 보는 사람에 따라 무수히 많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한다. 오석근이 드러내고자 했던 그 이미지를 보며 함께 안타까워하고 마음 아파하고 때로는 분노할 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송도국제도시와는 또 어떤 다른 의미와 관계망을 만들어 낼까?
교과서 다시 쓰기
박수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오석근의 이번 전시출품작은 교과서의 재해석을 보여준다. 오석근이 만든 교과서는 커버와 총 23장의 사진으로 구성되며 작품제목이 페이지로 매겨져 있다. 이 사진의 인물들은 1950-90년대 초반까지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등장하던‘철수와 영희’로, 교과서에서 나오는‘철수와 영희’가 해맑은 모습의 어린이상을 보여주었다면 오석근의 ‘철수와 영희’는 음울한 배경을 바탕으로 정체성의 혼란시기를 드러낸다.
교과서란 학생들에게 중요한 교본이다. 우리나라 학교 교육은 사실 한 인갈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을 길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학생의 주관적 사고를 중시하기보다 암기와 결과적 수치가 더 강조되고 그 속에서 겪는 소외감과 억압된 자유,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사회적 의식이 크게 자리 잡고 있다. 교과서가 갖는 평균성과 지향성이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과 본성을 억제하고 그것의 해결방안을 제시해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는 교과서의 진실성을 되묻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적 상황은, 경제가 고속성장의 그늘에서 개개인의 희생을 달갑게 받아들였던 때였다. 개인의 존재 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위해 많은 것들이 희생되어야 마땅했고 그렇게 이루어졌다. 개인의 사고와 상황이 사회문화의 영향과 떨어져 존재할 수 없듯이, 오석근의 사진은 외형적인 성장이 강조되던 사회 속에서 어린이의 심리 상황을 개인적이면서도 직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개인의 정신 심리적 상태는 특정 국가, 특정 세대의 것은 아닐지라도 우리나라의 시대 상황 속에서 극대화 된다.
‘철수와 영희’는 평균적인 인물로 성정되어 있다. 이 역을 맡은 사람은 어린이 프로그램인‘모여라 꿈동산’에 나왔던 마스크를 쓰고 그 기억의 장면을 재현한다. 이때 마스크가 주는 익명성 때문에 개인의 존재성은 은폐되고 심각성은 약회되며 희화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이전 초상사진인 <벌거벗은 노출>에서 오석근은 사람들에게 과거의 우울한 기억을 회상케 함으로써 얼굴 이면의 세계를 포착한 바 있다. 기억을 회상한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공통적이나, 초상사진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교과서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교과서>의 마스크는 초상사진의 표정과 동일하다. 고통스러울 때와 황홀할 때의 표정을 동일하게 보고 제작한 마스크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읽힌다. 관객은 숨을 죽이고 그 현장을 지켜보게 되는데,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민망함과 감정이입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작가는 슬라이드 필름을 스캔하여 무광의 종이에 어둡게 인화했다. 전체적으로 어둡고 축축한 느낌의 프린트는 암울함과 막막함 그리고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이 배어 나온다. 청자켓에 붉은 보자기 망토를 두르고 담벼락 위에서 고개를 떨군 철수의 모습은 슈퍼맨의 이상과 좁은 골목이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비장감마저 비친다. 또한 대표적인 교과서 장면인 잠자리채를 들고 뛰노는 철수와 영희 뒤의 오염된 하천과 공장지대는 이상성과 현실의 대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인형을 해체하는 잔인한 공격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오락실에서 과자를 훔쳤던 경험, 몰래 여자스타킹을 신어 보였던 성적 충동 등 은밀한 경험은 수치스런 기억으로 남는다.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시절,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 속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은 욕망은 부끄럽고 악할 수 있다는 죄책감으로 자리 잡는 그리고, 오래된 기억은 마치 무의식처럼 문득문득 현실 속에서 오버랩 된다. 감성적인 시기, 상처받은 내면은 단지 과거에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오석근의 작품을 접하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린다. 세계가 해석하는 방식대로 내 자신을 해석하고 다른 사람이 해석한 내 모습을 선택하며 부지불식간에 스스로를 소외시켜 온 것은 아닌지 되돌아본다. 상처의 기억이 한 개인의 것이기 이전에 우리 모두의 것임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과연 그 그림자로부터 해방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오석근의 사진은 치유의 힘을 갖게 되는가. 작가가 사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숨겨진 이상성에 대한 폭로인가, 보여지는 이면의 진실인가, 아니면 존재의 결핍에 대한 호소인가 잦아드는 가을, 오석근의 교과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 아이에게 어떤 얘기부터 시작해야할지 고민이 든다.
교과서의 뒤 그리고 전이轉移된 사랑
김노암 (전시기획자)
철수와 영희(영이)는 한 때 우리의 성장하는 의식(意識)의 무대를 활보하였다. 철수는 영희를, 영희는 철수를, 그리고 우리는 철수와 영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제 오석근의사진을통해우리만그들을바라본것은아니라는이상한각성을하게된다. 사실 철수와 영희 또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과서 시리즈를 보면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를 가로지르며 연결되는 특수한 한국의 현실과 이미지가 지닌 보편적인 심미적 효과가 잘 어울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철수와 영희는 융(Carl Gustav Jung)의 ‘페르소나persona(가면)’를 떠올리는데, 이는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 내재하고 있는 원형적인 집합적 무의식의 이미지(象)로 볼 수 있다. 철수와 영희는 우리(나와 너 그리고 그 너머)의 실존적 상징이며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
원형상(archetypos)으로서 철수와 영희는 나를 대신하고 너를 대신하며, 나와 너의 거울상이 되어 나와 너를 주체(主體)로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다. 철수와 영희의 역할 놀이를 통해 외상적 스트레스 장애(트라우마)는 사실 특수한 개별자들의 병적 징후라기보다는 인간 일반이 공유할 수밖에 없는, 또 그것을 통해서 비로서 주체로 거듭나는 선험적 조건으로 새로운 위상을 갖게 된다. 철수와 영희는 해방 이후 20세기 중 후반을 살아온 평균적인 한국인의 집합적 트라우마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정상적(?) 의식 이면에 은폐된 어떤 ‘것(It)’을 드러내는 통로이다. 동시에 주체를 향한 어둠에 쌓인 좁은 통로는 오석근의 사진이 향하는 길이다. 이는 사진이미지의 존재론적 자리인 ‘있음의 결핍’ 또는 죽음, 현재 여기 없음의 부재(不在)를 표현하는 길과 오버랩 하면서 욕망(결핍)을 드러낸다. 주체가 부재하는 주체 이전의 시기를 어떻게 표현하는가?
우리들의 의식은 원형적 유형과 이미지의 상호모방을 통해 무한히 복제되고 확대된다. 교과서 속의 철수와 영희는 현실세계의 수많은 철수들과 영희들을 호출한다. 의식의 여명기黎明期에 철수와 영희는 ‘철수와영희’라는 ‘원형적인 상처(傷處)’가 현상한 얼굴이자 나와 너라는 개별자를 구성하는 원리이다. 철수와 영희가 친절하게 인도하는 길은 새마을의 길이였고 수출금자탑에 빛나는 경제개발기의 우리의 초상이다. 철수와 영희는 갑돌이와 갑순이의 20세기 버전이지만 보다 윤리적이며 계몽된 모습으로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의 대중교육을 위한 또는 관리되는 사회를 위한 역할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나 철이와 영희가 계몽적 대중교육의 화신이자 전도자로 분주했던데 비해 지난날 갑돌이와 갑순이는 사랑의 상처를 껴안고 단순하지만은 않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맛보았다.
배제해온 것들이 꿈틀꿈틀 고개를 내미는 모습은 괴기스럽다. 그 거대한 존재성에 비해 한 없이 해괴하고 엉뚱한 모습은 희비극 적이다. 이번 전시에서 철수와 영희가 벌이는 사이코드라마의 정서情緖는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숨기고 부끄러워한 시간들이 사실 철수와 영희가 벌이는 검은 유희는 ‘존재의 결핍’의 다른 얼굴이다.
국정교과서 속의 철수와 영희와 나와 너가 그리고 우리가 벌인 계몽적 사랑은 사실은 일종의 전이轉移된 사랑이었고, 한국 사회가 열망하고 사랑하였던 대상이 사실은 무의식적으로는 다른 대상을 반영하는 것을 향하였다. 그것은 국정교과서에는 절대 등장하지 않는 어떤 결핍된 대상이었다. 그러니 오석근의철수와영희는한국인의정상적의식형성기에버린것들을추스르고재현하려한다고생각한다. 갑자기 라캉(Jacques Lacan)의 이상한 말이 떠올랐다.
“사랑, 그것은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전혀 원치 않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다.”
짧은 시간동안 집을 맴돌다 불꽃에 소멸되어갈 우리 -
오석근 <두 개의 집>에 대한 노트
한재섭 (시각문화연구자)
거기 두 개의 집에는 두 명의 아버지가 있고, 두 명의 소년이 있다. 그 두 개의 집은 (실선이 아닌) 붉은 점선으로 나누어져 있는 한 채의 집이고, 역시 두 명의 아버지와 소년은 한 사람이다. 소년시절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되지 않은 작가의 소년시절. 그리고 《두 개의 집》은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와 “재와 먼지(灰塵)” 연작이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개의 집을 나누는 붉은 점선의 경계에는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 라는 글씨가 새겨진 아크릴판이 기우뚱하게 세워져 있다.
오석근은 한국사회가 내세우는 표상들의 이면에 담겨있는 분열증적 자기증식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그것은 근대 이전과 근대가 아무런 가치판단 없이 국가에 의해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근대화 과정에서 빚어진 억압의 트라우마를 보여주는 작업이다.
트라우마는 깊은 무의식과 망각 속에 가라앉아 있는 듯 보이지만 끊임없이 욕망해야 하는 인간존재의 숙명처럼 표상의 한 꺼풀만을 벗기면 너무나 선연하게 꿈틀거린다. 모든 사람들은 같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은 두 사람이고 수많은 타자들이다. 수많은 타자들의 욕망은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져 나오고 그 뿌리는 다시 국가가 요구하는 가치에 맞게 하나의 표상 외 에는 모두 다 잔인하게 은폐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오석근은 이를 한국의 근대화과정에서 국가를 보위하는 존재로 훈육되어진 똑같은 교복을 입은 소년들, 도시의 스펙터클에서 비껴간(또는 의도적으로 배제된) 기이하게 증축 되버린 건축물에 은폐된 기억들을 불러내고자 한다. 포격에 무너진 바다건너 섬의 집에서 가져온 깨진 거울(가족들의 모든 얼굴들을 기억하고 있을), 동네 주민들에게서 수집한 사진들과 이를 태우는 제사행위로(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기억에서 지워진 불타는 사진들의 연대기), 그리고 위패처럼 전시공간 중앙에 모셔있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소년시절을 나무 뒤에서 은밀하게, 동상 앞에서 희희덕거리며, 또는 태극기가 걸린 강당에서 준엄하게 바라보는 소년들, 이들 모두를 두 개의 집으로 불러 모은다.
두 개의 집에 모인 소년들은 그러나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다. 사진 속 시간의 차이에도 하나같이 집 밖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들은 모두 똑같은 포즈와 표정을 짓고 있다. 어두운 공원 덤불 뒤에서, 운동장 끄트머리에서, 홀로 남은 교실에서 애처롭게 혹은 불량스럽게 허공을 입에 문 것처럼 멍하게 있는 소년들은 결국에는 기념비와 같은 포즈를 흉내 내며 위태롭게 서있다. 대물림되고 있다. 누가 그들을 집밖에서 학교와 도시의 후미진 곳을 맴돌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근대화가 시작되던 시절에도 지금 근대화가 끝났다고 말하는 시절에도 모두 똑같이 그들은 불길하게 서성이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에 의해 창조되고 버림받은 괴물은 집 주변을 서성거리지만 끝내 들어가지 못하고 세계를 파괴하려 한다. 그 괴물과 같이 국가에 의해 훈육되어진 소년들은 아버지와 같은 욕망이 아니고선 세계에 편입될 수 없다는 사실에 역겨워하지만 어찌할 줄을 모른다. 아버지의 소년시절도 마찬가지이다. 수많은 프랑켄슈타인의 자식들은 자신처럼 흉측해진 집을 언덕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한 없이 불길하고 측은한 눈빛으로. 또는 저 ‘두 개의 집’을 불태워버리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두 개의 집》은 그동안 오석근이 파헤친 한국사회의 괴물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이자 작가로써의 새로운 재생을 향한 레퀴엠이다. 이제 작가는 초기 “철수와 영희”의 기묘한 탈을 내려놓고 소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실재의 오브제와 수집된 사진들, 무엇보다 자신과 아버지의 소년시절이 가진 억압의 기억을 드러냄으로써 (재현이 아닌)그 실체에 정면으로 마주치고자 한다. 붉은 점선의 경계에 기우뚱하게 서있는 ‘내게는 아무것 두려움 없어’는 아버지의 세계와 가진 긴 시간동안의 불화가 끝나고 조숙한 소년이 성숙한 젊은이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는 선언인 셈이다. 이제 불화가 아닌 세계와의 대결을 피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결기 가득한 독백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동갑내기인 작가에게 김현이 젊은 시인들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아니 나도 그와 함께 들으려 한다.
나는 타자다. 그러니까 세계는 바뀌어져야 한다.
누구도, 마음에 상처를 입지 않고 어른이 될 수는 없다.
우시로쇼지 마사히로 (큐슈대학 교수,
아시아 근현대 미술사)
그것은 마치 자기자신도 모르는 유소년기의 앨범을 넘기는 것 같은 감상이었다. 지붕에
선 슈퍼맨으로 분장한 소년은, 쇼와 30년대(1955-1964년)의 나 자신이다.
내 경우에는 월광가면(月光仮面, Gekkou Kamen)이었지만. 그 때는 목에 보자기를 감는 것만으로 모두가 월광가면이 될 수 있었다. 머리모양도
나와 같았고, 조금 우울하고 불안해보이는 표정도, 오래된
앨범에 붙여진 사진 안의 나 자신이었다.
오석근의 작품 『교과서(철수와 영희)』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등장인물인 남자아이 「철수」가 유소년기의
나 자신과 너무나도 닮은 것에 놀랐다. 남자아이를 둘러싼 풍경도 쇼와 30년대 일본의 지방 공업지대, 나의 고향과 똑같았다.
이 23점의 연작은 어린시절의 잊을 수 없는 기억, 트라우마로 마음에 새겨진 기억을 캐내서 그것을 재현한 것이다. 아이들은
작품 안에서 가면을 쓰고 「철수와 영희」라는 이름을 부여 받는다. 일본이라면 「타로와 하나코(太郎と花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현실에서 만날 수는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말하자면 모든 한국 소년.소녀의 자화상이다.
그리고 어느 나라, 누구라도 마음에 상처를 입으면서 어른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에 의한 70년대 군사독재정권부터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의 90년대까지, 한국의
교과서는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반영해서 격렬한 반공 프로파간다, 애국적인 내셔널리즘에 물들여져 있었다. 아이들의 「성경」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교과서로 상징되는 교육에 짙게 투영된 정치성에 의문을
느낀 오석근은, 교과서에 쓰여지지 않은 한국인의 개인사의 은밀한 한 페이지를 모아서 사적으로 독특한
교과서를 만들지만, 그것은 그대로, 강권(強権)적인 독재정치 하에서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급격한 경제 성장을
완수한 한국의 모순과 곤란이 가득 찬 현대사이기도 하다.
내 소년기의 최대의 이벤트는 도쿄 올림픽으로, 그 시기 나는 10살이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나고, 오석근은 9살에 서울 올림픽을 맞이했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시간을 초월해서, 가난한 나라의 두 명의 소년
「철수」와 「타로」는 동일한 발전과 혼란, 모순의 시대를 견디며 살아남아 어른이 되었을 것이다. 그 부드러운 마음에 새겨진 상흔은 특정한 개인과 특정한 사회를 넘어서, 보편적인
개인과 사회의 이야기가 되어 우리들의 앞에 찾아온다.
사진과 말, 오석근 - 오석근 개인전<기억투쟁>(12.30 ~ 1.13. 공간해방)
한재섭(시각문화연구자)
사진이 기록이라면 말은 기억일 것이다. 사진은 증거를 남기지만 말은 증거를 남기지 못한다. 증거를 남긴다고 사진이 모든 기록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말이 모든 기억에서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기록과 기억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사진이 발명되기 전 기록은 문자와 그림이었다. 문자는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 기록을 소유했고, 그림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기록을 보충하였다. 문자와 그림 모두 유한한 인간의 운명과 문명의 진화과정에서 사라진 어떤 사실들을 복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문자와 그림을 읽고 볼 수 있는 사람만이 역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복원하려는 대상보다 복원된 이미지가 더욱 오랜 생명력을 갖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이미지네이션(imagination)을 세웠다. 필연적으로 과거를 재구성하고 신비화하게 되는 이미지네이션에서 이미지는 사실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직접적으로 증언해줄 수 있었다.
그러다가 그림의 리얼리티를 빼앗은 사진의 기계이미지가 문자도 그림도 모두 밀어내고 이미지네이션의 왕좌를 차지했다. 기록을 담당하게 되었다. 과거의 재구성을 증언을 신비화를. 그런데 기계이미지의 기록은 문자로 둘러쌓여 있던 그림이미지와 달리 신전과 사당에서 경전과 율법에서 벗어나 제 멋대로 조립될 수 있었다. 몽타주였다.
말은 원래부터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말에 의해 구성되는 과거의 기억들도 제 멋대로 조합되었다. 이리갔다 저리갔다 전봇대 뒤에 숨어있기도 하고 모두가 나가버린 텅빈 교실의 책상밑에서도 말은 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종종 현자(賢者)라 칭해지는 자들의 말은 불을 옮기고 물을 가르고 산을 옮기기도 하였다. 때론 바가지 하나로 공주와 동침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말이 현자의 말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호열자처럼 제 멋대로 세상을 횡횡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말을 문자로 기록하게 되자 말은 더 이상 말이 아니었다. 율법이었다. 그럼에도 구애받지 않은 말은 과거만을 보지 않았고 현재의 심사(心事)와 미래의 정념(情念)을 투영시켜 과거의 말을 만들어내기도 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몽타주였다.
이미지네이션의 왕국에서 이미지와 말은 그래서 소문이 될 수 밖에 없다. 제 멋대로 조립될 수 있는 이미지와 말은 누가 기록하고 기억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위서(僞書)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문을 누가 어떻게 기록하느냐가 중요해진 것이다. 이제 소문은 이미지와 말의 도움을 받아 언제든지 조립되고 조합되어 기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는 기록이 기억을 변방으로 몰아내고 있다.
왜냐면 기록은 (거꾸로)문자의 도움을 받아 왕의 판결권에 신탁을 부여하는데 쓰이지만, 기억은 왕의 판결권에 위해를 가하는 불경스러운 말들로 분류되어 당굴들을 쫒아내는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은 왕국의 백성들 모두가 읽어야 하는 독본(讀本)으로 만들어져 널리 배포되지만, 기억은 입과 입으로만 전파되며 써치라이트가 꺼진 동굴 속에서 이끼와 함께 자라날 뿐이었다. 기록이 밝은 광명아래 새파란 잎순처럼 매일매일 돋아나는 것이라면 기억은 광명이 버리고 간 암흑속의 거대한 뿌리같은 것이었다. 종종 세월에 의해 파헤치고 깎여진 기억의 뿌리에 넘어진 사람 몇몇만이 기억을 건져 올렸다. 쫒겨난 당굴들과 함께.
그래도 이제는 모두가 떳떳이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찬란한 광명의 이미지네이션에서, 신전과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이미지의 시대에 왜 말은 문자를 넘보고 기억은 기록을 저주하는가? 현대의 현자들인 예술가들은 바로 이 버림받은 말과 저주의 소문속에서 태어나고 있다. 말(言語)의 사당이 무너져 내린 이미지의 왕국에서 그들은 밝은 써치라이트에 의해 지워지는 암흑의 공간을 찾아내고 있다. 빛이 닿지 않은 어둠속에서 기록으로 지워진 기억들을 끄집어내고 있다. 번지르한 기록들을 어지러이 교란시키려고 한다. 당굴처럼 자신만의 암호와 주술과 독경으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마치 여름 밤 잠깐 왔다 사라져버리는 반딧불처럼. 그런데 그 반딧불은 내년 여름에도 그 내년 여름에도 또 우리곁으로 올 것이다. 물론 기록의 써치라이트도 그들을 찾을 것이다. 빛으로 소멸시켜버리기 위해서.
오석근의<기억투쟁>은 국가기록원의 사진과 구술사연구로 채록된 말들을 한 공간 안에서 대비시키고 있다. 국기기록원의 사진은 유능하고 학식이 높은 전문가들이 포진되어 있는 국가에 의해 교열정리된 사진들이다. 국가가 인정한 공식적인 기록의 사진이다. 구술사에 채록된 말들은 돌에 매달아 바다에 빠트린대도 누구 하나 눈 하나 깜짝 않을 사람들의 말이다. 또는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의 말이다. 국가가 배제한 비공식적인 기억의 말이다.
국가기록원에서 뽑아낸 사진들은 1961년 5월 16일 전후에 벌어진 사건을 역사의 증거로 쓰고 있다. 그럼에도 정작 가장 중요한 5월 16일 당일의 사진은 없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날 썬그라스를 낀 쿠테타 세력이 찍힌 사진은 국가기록원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쿠테타를 끝낸 직후 밀려오는 흥분과 긴장감을 억누르며 이제 어떻게 해야지라는 혼란스러움이 역력한 사진은 없다. 사진속의 그들은 어느 누구도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대신 쿠테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국무총리 퇴임 기자회견, 깡패들의 조리돌림, 쿠테타에 참여한 군인들을 위한 위문공연 사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을 찍는자나 찍히는 자나 이 사진이 어떤 증거로 쓰이게 될지를 알고 있는 상당히 차분한 사진들이었다.
구술사의 말은 한국전쟁 전후 인천과 강화도 등지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대한 원통함과 한이 맺힌 격정적인 말들이다. 소문을 따라 간 사람들, 소문 때문에 죽고 죽인 사람들, 소문을 보고 도망친 사람들, 소문으로 평생의 기억을 닫아 버린 사람들이 토해내는 방언과도 같은 것이었다. 피냄새가 진하게 베인 말들은 당굴나무 밑을 세차게 흔드는 바람처럼 기억의 봉인을 가까스로 해제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옮겨지고 있었다.
오석근은 사진 기록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것은 사진 밑에 쓰여진 문자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진이 보여줄 수 없는 말들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오석근이 싸우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그는 이것은 파이프도 아니지만 기록도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분명 그는 사진가인데 사진을 보고 그것은 기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그가 들이미는 증거는 모순되게도 말이다. 사진은 말을 보여줄 수 없고 말은 사진으로 남길 수 가 없다. 그런데도 오석근은 사진에 말을 담으려 하고 있다. 아니, 아주 오래전부터 그는 그래왔다.
그가 세상에 알려진 <교과서(
철수와 영희)>는 사진이 처한 숙명적 운명인 죽은 시간들을 불러내는 작업이었다. 교과서에 의해 영영 잃어버린 시간들을 역시나 찰나의 순간만을 담아내는 사진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을 추념(追念)하고자 하였다. 그 시간속에서 우리는 집도 학교도 가지 못하고 빈 창고와 옥상에 찬밥처럼 내던져진 소년소녀들의 고통을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했다. 이 작업은 일민미술관에서 진행한 <청소년>작업에선 더욱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다. 탈을 쓰지 않은 민낯의 청춘들이 폐허의 공간에서 벌이는 무의미한 몸짓들은, 그것이 곧 휘발되버릴 것을-이미 사진을 찍는 순간 휘발되버렸으니- 알기에, 그 시절을 지나온 우리도 알기에 더욱 날이 선 상처자국(punctum)으로 찔러온다.
상처받은 시간, 상처자국의 사진은 다시 <재와 먼지> 에서는 그들이 자꾸 멤도는 집도 사실은 모두 뒤죽박죽으로 뒤엉켜버린 상처자국에 불과함을 보여주고 있다. 압축적 근대화 과정에서 제대로 된 집 하나 없이 떠돌고 있는 한국인의 운명, 높은 고층아파트도 역사적 건축물로써 기념비도 아닌 그때그때 땜질하듯 증축해온 한국인의 황량한 공간을 펼쳐내고 있다. 찬란한 써치라이트의 빛조차 포기한 듯 한 소문들이 기생하기에 더없이 좋은 숙주처럼 흉측한 건물은 그대로 한국인의 심상(心想)이다.
이런 마음의 심상은 <얼굴 없는 한국인>에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실과 맞닥뜨리게 하면서 공포감을 배가시키고 있다. 우리가 만든 괴물을 보라는 듯한 웅변으로 들리는 <얼굴 없는 한국인>은 제국주의 시절 서구에 의해 인종학적 편견으로 제작된 엽서사진을 재현한 <한국의 풍습> 과 이어지는 작품이다.
특히 이번<기억투쟁.전시에서 <얼굴 없는 한국인>은 보도연맹사건 당시 총살당한 사람들, 학살당한 가족을 부둥켜 안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지우고 밝은 전시공간 뒤편 까맣게 어두운 공간에 전시하여 그 충격을 가중시키고 있다. 전짓불로 관람해야 하는 작품들은 실재 학살이 일어난 동굴, 폐광 등의 역사적 현장과 시간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는 기시감을 갖게 해준다.
광주 518민중항쟁을 모티브로 삼은 <비난수 하는 밤-행불소년>, <붉은 신호등 아래 민주주의>는 항쟁당시 버려진 시체와 행방불명된 귀신들을 맞이하는 일종의 퍼포먼스와 같은 재현이었다. 반면 영상으로 제작된 <명령 레지스터>는 군가가 나오면 자동으로 반응하는 착검을 한 계엄군에게서 국가가 한 개인을 어떻게 파괴시킬 수 있는지를 처참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쩜 이 작품을 사진이 아닌 영상으로 제작한 이유가 518이 지나고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은지 한 세대가 지났어도, 언제든지 다른 사람을 짓밟을 수 있도록 훈련된 지금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강하게 불러 일으킨다.
이런 추측은 <TV-명령펄스>에서는 확신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번《기억투쟁》전시에서 조금은 이질적인 작업으로 볼 수 도 있으나, TV의 주파선과 모노톤의 칼라바, 불균질적인 소음들의 반복재생은 이 모든 기록의 조작과 기억의 혼란을 가능케하는 비밀스런 공모를 폭로하고 있다. 교과서와 국가기록원, 그리고 미디어로 이어지는 또는 여전히 서로서로 공생하는 그들의 모종의 담합과 거래를 말이다. 형식적으로는 <TV명령펄스>는 김수환과 공동으로 작업한 <기계-프로토타잎>의 연장선에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물론 <기계-프로토타잎>역시 히드라의 거울처럼 딱딱하게 파편화된 자신을 대면케 하는 전략으로 문명의 억압에 익숙해진 개인의 비참함을 비추고 있다.
오석근이《기억투쟁》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명확하다. 아니다. 그의 작품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말하고 싶다가 옳은 표현이겠다.(명확하다는 것은 문자를 다루는 자들만이 내뱉을 수 있는 오만이므로) 나의 아둔한 머리로 그것은 사진과 말이다. 그는 분명 사진을 다루지만 사진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사진은 재현된 사진이다. 그리고 그는 국가의 공식적인 기록을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교과서와 국가기록원에 기록되지 않는 말들을 따라 나선다. 고통이 가득한 말들 사이로 사진기를 들이내민다.
그런데도 그의 재현된 사진이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우리도 모두 기억의 뿌리에 걸려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내놓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앉은뱅이 약사와 귀머거리 악사에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고통이기 때문이다. 집 밖에서 떠도는 말들, 버려진 말들, 바다속에 수장된 말과 사람들, 소문에 감염되었다고 제 무덤을 파고 집밖에서 죽어간 사람들 그들의 말을 오석근은 불러낸다. 기록한다. 국가기록에서 배제된 역사의 알리바이를 사진과 말로 필사의 추적을 해내고 있다. 그 속에서 그는 소문이라 치부되었던 진실들을 만난다. 문자로는 결코 증언될 수 없는 역사의 공백을 보여준다. 소문의 반대말은 비밀이다. 그 말은 소문의 끝은 비밀이라는 것일 것이다. 오석근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바로 역사가 감추어온 비밀이다. 그것은 국가가 만들어놓은 기록이란 것이 백골의 노인네가 수음(手淫)을 즐기며 화장(化粧)을 하고 있는 죽은 사당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두가 이미지를 다루고 문자를 기록할 수 있는 시대에 오석근은 자꾸 음습하고 어두운 기운이 가득한 곳으로 들어가고 있다. 소문이 있는 곳, 그래서 비밀이 있는 곳. 그 곳으로 오석근과 같은 어리석은 현자들이 모여 든다. 그들만의 방언과 몸짓으로 망루를 만들고 있다. 써치라이트의 불빛이 닿지 않은 변방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열심히 신호를 보내고 있다. 어둠의 소멸에 대항하라고, 하나의 불빛에 이미지를 잃지 말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