之 : Zigzag _  Private House 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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之 :  민가 연구

실용펑크, 액체계단


집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주(住)로, 인간의 생활 문화를 담은 그릇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집을 바라보는 것은 그릇에 담긴 우리의 삶과 미시적인 사회문화사를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좌동의 주택은 주안염전을 매립한 곳에 기업의 수출 증진을 위한 주안국가산단이 들어서면서 지어지기 시작했다. 산단의 노동자를 적극 수용하면서 농촌마을인 가좌동의 정체성은 공단 배후의 주택단지로 바뀌었다. 이때 노동자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하거나 용적률을 높이기 위해 각 층으로 연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이 무언인지 고민하여 대문 위로 계단을 놓거나 3층으로 가파르게 연결되는 계단을 놓는 등 혁신적인 방법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실용성을 그 어떤 가치보다 최우선을 둔, 즉 기능이 강조되고 동일한 방법이 지역에서 보편화 되면서 특정적인 주택 다자인이 자리 잡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택 건립 당시 집 내부에 화장실을 만들지 않고 외부 계단 아래에 공용화장실을 만들어 사용한 경우가 많았다. 현재는 집 내부에 화장실을 만들어 개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외부 공용화장실은 대부분 창고 등으로 변하였다. 가좌동의 집들은 건립 당시 법에 따라 지하를 파 방공호로 갖춰야 했으나 주안산단의 노동자 거주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기존 방공호를 여러 개의 방으로 쪼개어 세를 놓기 시작했다. 많게는 13-15세대가 다가구주택에 살았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현재 이 공간은 대부분 공실이지만 최근 외국인 노동자들이 하나둘 그 공간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그 외에 가좌동의 주택에는 약 40여년 동안 사용자의 취향과 미감에 따라 내.외부를 수리, 보수, 증축한 흔적 또한 찾아볼 수 있다.


가좌동

가좌동은 가재울과 건지골, 감중절리 그리고 능안말이라는 세 개의 자연취락이 있던 곳이다. 갯골과 바다를 마주하며 농사를 짓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으며 윗나루와 아랫나루가 있어 배를 통해 인천 원도심을 왕래하거나 서울, 김포, 강화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교통의 중심지로 자리해왔다.
1907년 마을 앞 갯벌에 우리나라 최초로 천일염을 생산하는 주안염전이 대한제국에 의해 조성되었고 1910년 이후 조선총독부 전매청, 1963년 대한염업(주)이 관리, 운영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마을에 ‘개발단’이라고 불리던 전쟁 피란민들이 일부 지역에 정착하기도 하였으며 1967년 인천과 서울을 오가는 경인고속도로가 착공되고 1968년부터 1974년까지 대한염업(주) 소유였던 주안염전이 소금 생산 기능을 상실하면서 매립되었고 그곳에 기업의 수출 증진을 위한 주안국가산업단지가 들어선다. 1984년경에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던 가좌동 땅을 한국토지개발공사(현 LH)에서 매입하고 함봉산 아래 있던 밭의 토지를 이용해 논(떡 방죽)을 매립하여 평탄화하고 대규모 주택지를 조성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 - 함봉산 아래 학운정 일대에서만 예전 농경사회였던 가좌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가좌4동의 주택은 주안산업단지 노동자들의 거주 수요를 반영하여 단독주택보다는 다가구주택 형태의 건축물이 주를 이루게 된다. 또한, 다가구가 거주하였기 때문에 각 세대의 동선과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건축물에 다양하고 획기적인 발상으로 계단을 설치하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는 기존 주택의 형태를 뛰어넘는, 개성 넘치는 주택군의 형성으로 연결된다.

현재 가좌4동은 시흥 시화공단의 확장으로 많은 공장이 이전함은 물론 공장의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해 유입 노동자 수가 줄어들고 노령인구 비율이 높은 마을이 됐다. 또한, 마을 인근에 두산아파트가 입주하고 라이프아파트의 재건축이 진행되는 등의 변화가 생기면서 재개발 관련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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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ion Period : 2021 -  / Media : Digital c-print /  Size Variable / Location : Incheon, South Korea / Number of Works : 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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